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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22 태풍의 전조(前兆)들

폭풍의 바다와 싸우다(11)

태풍의 전조(前兆)들

    그동안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미국 대선에서 부시 현 대통령의 재선일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부시의 재선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행복한 모습을 보였고, 부시와 공동 운명의 동맹을 추구해 온 영국의 블레어 총리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다. 반면에 공공연히 케리의 당선을 지지한 유럽의 지도자들은 아주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표정은 어떤가. 평양은 내심으로 아주 당황했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대북정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그동안 6자회담에 불응하고 정세를 긴장시켜 왔는데, 다시 부시가 당선되었으니 그들의 의도대로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북은 알아야 한다. 민주당의 케리가 당선된들 무슨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미국은 그저 미국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면 대외정책을 검토(review)하느라 6개월이 소요되는데, 평양이 그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상당한 사람들이 케리가 당선돼도 북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더 강경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는 사실을 평양은 명심해야 한다. 평양은 이제 핵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서울은 어떨까. 북핵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미국의 대선 결과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문제는 청와대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이다. 이에 관하여 최근 언론에 아주 흥미 있는 보도가 눈에 띈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미기업연구소(AEI)'의 한반도 전문가인 선임연구원 니콜라스 에버스타트(Nicolas Eberstadt)박사가 부시의 낙선을 기원한 청와대 인사를 모두 알고 있으며, 부시의 재선을 보며 청와대에 비상이 걸렸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나아가 앞으로 한미관계가 험난해질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청와대가 이를 부인하였지만 문제는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이다.

   나는 에버스타트를 잘 안다. 처음 그의 논문 “한반도조기통일론 (Hastening the Reunification of Korean Peninsula)"을 읽으며 큰 감명을 받았다. 나의 관점과 일치하는 바가 너무나 많았다. 그의 저서 ”북한의 종말 (The End of North Korea)"도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내가 1999년 워싱턴에 있을 때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 대사에게 그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릴리 대사는 당시 AEI의 아시아 담당 책임자로 있었기 때문에 나의 부탁을 듣고 “아, 닠(니콜라스를 줄여 닠이라 불렀다) 말이군요, 그는 하버드 대학의 연구원이기도 해서 반은 워싱턴에 있고 반은 대학에 있는데 곧 만나게 해드리죠”라고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아주 젊은 유태계 학자였다. 전공은 정치경제학이었다. 그는 아주 냉정하고 과학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분석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래도 우리 민족의 문제이므로 감정이나 정서가 개입 되게 마련이지만, 그는 철저하게 실증적으로만 접근하였다. 그래서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 그는 북의 식량문제와 이를 지원하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관하여 연구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북에서 94년부터 몇 명이나 굶어 죽었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30만 명에서 300만 명의 이야기가 있는데, 나의 판단은 300만 명입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기간 중 홍콩으로 탈출한 중국인들이 약 5,000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이야기하였는데, 그 때 누구도 그 말을 잘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끝나고 중국이 개방되었을 때, 그 말은 진실로 밝혀졌습니다. 북한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몇 명되지 않는 한반도 전문가 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사람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 의견을 구하는 몇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런 그가 앞서와 같은 다분히 감정 섞인 말을 하였다니 나의 기분도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야당이나 다른 단체가 아니라 청와대는 나라의 상징이고, 결과는 국익으로 직결되니 말이다. 앞으로 한반도는 북핵문제로 태풍의 눈이 될 것이다. 우리와 미국이 하나가 되어 신중하게 대처해도 긴장이 어디까지 높아질지 숨이 막히는데, 에버스타트 박사의 말대로 부시 행정부가 청와대를 불신하고 홀로 전략을 구사한다면, 우리의 국익은 누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단 말인가. 암담한 생각이 앞선다.

   하기야 요즘 저 사람들 하는 행동을 보면 걱정은 나나 국민의 몫이지 그들의 관심은 아닌 듯 싶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경제위기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하던 사람들이 요즘엔 자기들 입으로 “나라가 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년부터 국민의 연기금을 증시에 투입하는 등 한국의 뉴-딜 정책을 쓰겠습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위기가 깊어질 대로 깊어지고, 나라가 대공황의 계곡에 갇혀 있을 때에나 나올 수 있는 말이 국정을 책임진 저들의 입에서 쉽게도 나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한국사회 혼란의 원인을 극명하게 지적한 말이 또 미국 교수의 입을 통해 나왔다. 조지타운 대학의 스타인버그(David Steinberg)교수가 “사회혁명이 한국을 흔들고 있다(A social revolution shakes South Korea)"고 한 말이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저들은 개혁이라고 강변하지만 미국 내 가장 권위 있는 한반도 전문가이자 원로교수인 스타인버그가 개혁(reform)이 아니라 혁명(revolution)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나는 스타인버그 교수를 몇 차례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있다. 그는 정말 신중하고 사려 깊은 노 교수이다. 그 인품이 동양의 어른 같은 분이다. 가장 오랫동안 한반도 문제에 연구를 거듭해 온 학자 중의 하나이다. 그의 아내도 한국인으로서 조지 워싱턴 대학의 교수이다. 그런 그가 혁명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최근 여당 인사들이 갑자기 야당을 향해 왜 자기들을 친북좌파라고 규정하느냐며 신경질을 낸다. 자신들의 행동이 개혁인지 혁명인지를 먼저 성찰하기 바란다. 혁명이라면 무엇을 지향하는지 스스로 돌아보기 바란다. 이 미국의 노 교수가 걱정하는 바를 곱씹어보기 바란다.

   혁명이란 권력을 잡기 위해 하는 것인데 정권을 잡은 자신들이 무엇을 더 얻으려 혁명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답이 나오면 숨기지 말고 국민에게 말해야 한다. 오늘 혼란에 시달리는 우리 국민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일은 저들이 진정한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잘못된 노선은 비판의 대상이지만, 숨기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태풍은 저 멀리 남 지나해에서 생성한다. 올라오며 에너지를 보강한다. 그리고 약한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무서운 재앙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오늘 한반도를 향해 빠른 속도로 태풍의 핵이 성립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느낀다. 나라 안팎의 어둡고 습기 찬 기운이 그 태풍의 위력을 키울 것만 같은 두려움을 또 많은 사람들이 느낀다.

   이제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의 주인이며, 운명의 주인공이라는 믿음으로 나서야 한다. 태풍의 눈을 소멸시키고, 태풍에 힘을 보탤 기운을 약화시키고, 태풍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최선을 다 할 때 하늘은 우리를 도와주실 것으로 믿는다.

2004. 11. 13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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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뉴스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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