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 부는 바람(2)
거산(巨山)과 거인(巨人)
큰 산(巨山)에 오를 때 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느끼게 된다. 산은 말없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준다. 정상에 올라 발아래 도회(都會)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우리가 또 얼마나 무모하게 인생을 살아가는지 깨닫게 된다. 물론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느 사이 세파(世波)에 파묻혀버리지만 말이다.
나는 며칠 전 거산(巨山)의 팔순(八旬) 축하모임에 참석해 말석을 지킨 일이 있다. 내가 정치에 입문한지 꼭 20년이 되었는데 처음 10년은 거산의 문하에서 성장하였다. 그 때 함께 정치하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권좌(權座)를 떠난 지 10년. 그래도 거산을 만나러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친다. 요즘과 달리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가 말한다. “나는 감히 고백하거니와 한 인간으로서 비겁하게 살지 않았다”, “나는 사사로운 이익을 탐해 본 일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니 큰 산을 오를 때처럼 나 자신이 너무나 작아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나는 정치 초년 시절 대변인을 하면서 1년 가까이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관찰한 경험이 있다.
나는 단 한번도 그가 자세를 흩트리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그는 언제나 당당하였다. 당당함이란 도덕적으로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미덕이다. 역사 앞에서, 동지 앞에서 그리고 시대의 요구 앞에서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였다.
그의 고백을 들으며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거산(巨山) 안에 있을 때 산의 크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거인(巨人)의 품 안에 있을 때 얼마나 큰 인물인지를 느끼지 못하였던 것은 아닐까!
나는 새삼스럽게 이 시대의 한 거인을 마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지난 시절 그로부터 정치를 배우고 역사의 물결을 헤쳐 나온 일이 한없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관대한 마음으로, 그러나 자신에게는 너무나 엄격한 자세로, 사람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었던 거인! 아, 언제나 청년 같던 그가 이제 팔순을 맞이하다니,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게 된다.
그는 거듭 거듭 위대한 국민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고난과 영광을 함께했던 동지들에게도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였다. 그리고 지난 세월 민주주의가 상처를 입을 때의 고통을 떠올리며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노구를 이끌고라도 언제든지 투쟁에 나서겠다는 결의를 다짐하였다.
한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노병(老兵)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외친 맥아더를 연상하였다.
엄혹하기만 했던 독재의 어둠을 뚫고 민주주의의 아침을 열었던 거인 김영삼! 역사의 지평에서 거산처럼 우뚝 솟아 영원한 민주주의의 이정표(里程標)로 남을 것이다.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시기를!
2008. 1. 14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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