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바다와 싸우다(7)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다. 생각의 힘은 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로부터 나온다. 또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것처럼 ‘사회적 동물’이다. 결국 사람들은 사회적 공동체로서 국가를 이루며, 자기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사고하고 행동하며 새로운 이념과 체제를 발전시켜 나간다. 이것이 한 나라의 역사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이념논쟁이 한창이다. 좋아하는 사람보다 지겨워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제 와서 이 논쟁을 피할 수도 없다. 아니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가능한 한 치열하고 빠르게 이 논쟁을 종결시켜 나라의 이념과 사회의 가치를 한 차원 높이 고양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급하다. 안보의 불안, 경제의 침체, 사회의 무질서 등 온갖 병폐가 따지고 보면 바로 이 이념과 가치의 문제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보자! 지금 정권을 잡은 세력과 그들의 전위대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념적 정체를 ‘진보’라고 자처한다. 과연 진보인가. 그렇지 못한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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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 지금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야말로 ‘보수’라고 자부한다. 과연 보수인가. 그렇다면 왜 저들이 이들을 가리켜 ‘냉전 수구 꼴통’이라고 욕지거리를 하는데도 이 말이 대중들에게 먹혀드는 것인가. 우리는 그 진실을 알아야 한다. 진보와 보수는 사람의 가치지향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근대사회가 성립되면서 등장한다. 특히 근대사회의 경제체제인 시장경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냉전이 격화되면서, 진보와 보수는 사회발전을 이끄는 양대 축(軸)의 개념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전통적인 봉건사회로부터 시민혁명,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 시민사회를 이끌어낸 유럽 사회에서 무리 없이 통용될 수 있는 설명이다. |
이민 개척자들이 자유의 정신으로 나라를 세운 미국 사회에서는 아예 사회주의 자체가 힘을 얻지 못하여 유럽과 같은 진보의 개념도 사회 발전의 축을 이루지 못한다. 미국에서는 progressive가 아닌 liberal이 보수(conservative)에 대칭을 이루고 있다. 미국 사회의 liberal이 유럽 사회의 progressive와 다른 개념임은 물론이다.
우리 사회의 이념 지형은 어떠한가. 한반도를 놓고 보면 치열한 냉전구도가 아직도 해체되지 못하고 있다. 남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한다. 냉전체제하에서 이를 부정하는 반체제세력은 지하에 숨어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북과 연대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세력들은 그동안 여와 야로 나뉘어 투쟁해 왔다. 한편은 상대를 독재로 몰아 세웠고, 다른 한 편은 경제 건설이 우선이라며 자유의 유보를 합리화 시켰다. 이렇게 그동안 제도권 안의 정치세력은 크게 보면 그 가치 지향에서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한편은 권위주의적이었고, 다른 한편은 이를 해체하고자 투쟁하였다.
이 투쟁의 과정에서 산업화는 급속히 진행되고 우리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다원화되어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의 전통적인 좌파정당과 같은 정당이 제도 정치권에 진입하게 되었다. 또 과거 반체제 운동에 젊음을 바쳤던 세력의 일부가 정권의 핵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아직까지 자유민주주의 가치는 제도상으로는 완성되었는지 모르나, 권력의 문화나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는 미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판단된다. 시장경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아직도 개발경제시대로부터 힘겹게 시장경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구체적 모순들은 저 유럽의 자유로운 시장으로부터 생겨난 모순과는 판이하다. 오히려 국가권력의 개입과 간섭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유럽에서의 진보란 시장을 지배하는 자유의 과잉으로부터 생겨난 모순, 이를테면 빈부의 격차, 사회적 불평등 같은 잘못을 사회주의적 원리를 제한적으로 적용하여 시정함으로써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이념적 지향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모순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럽 사회의 모순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런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원리를 들고 나온다면, 우리가 그러한 주장에 진보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겠는가. 나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한 태도는 그저 사회주의적이거나 반체제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궁극적인 가치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국가권력이 넘치는 시장과 독재가 판을 치는 사회를 통해 기득권을 키워온 사람들이 마치 보수의 상징인 것처럼 행세한다면 이 또한 중대한 착각이다. 보수란 가능한 한 시장과 사회에 자유가 넘치도록 하려는 가치지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그들이 보수를 외쳐도 힘을 얻지 못한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인류문명도 마찬가지이다. 변화의 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계화와 지식화이다. 국민국가시대가 해체되고 지구촌시대가 다가온다. 산업문명으로부터 지식문명이 밝아온다. 이제 모든 국가, 기업, 국민들이 이 변화에 적응하고 변화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하고 있다.
말하자면 판(板)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앞서가는 나라들에서는 과거 이념의 스펙트럼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영국 노동당이 내세우는 ‘제3의 길’, 독일 사민당이 표방하는 ‘새로운 중도’는 이 이념적 과도기에서 겪는 혼란과 고민을 상징하는 개념들이다. 당연히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서 사회주의 본영(本營)은 와해되었다. 중국은 점진적으로 현대화 개혁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므로 사회주의 골격이 유지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경제는 물론 정치도 종국적으로는 다원주의로 나갈 것으로 믿는다. 쿠바와 북한만이 변화의 물결을 거부한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사회에 더 이상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이나 열정은 살아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피폐한 인민의 삶과 앙상한 권력의 독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좋든 싫든 그것은 객관적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나 사회주의적 원리를 내세우며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 관하여 무지하며, 세계 변화에 둔감한지를 자각해야 한다. 그들의 태도는 과학적으로 분석할 때 진보(progressive)가 아니라 퇴보(regressive) 또는 퇴영(retrogressive)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가치와 체제를 따른다면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겠는가. 21세기 지식강국으로 가겠는가, 낙후된 과거로 가겠는가. 미래가 없는 허구의 이념에 더 이상 우리 사회가 휘둘려서는 안 된다.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체제의 실체를 내세워야 한다. 특히 과거 독재와 관치경제의 특혜를 누렸던 사람들은 통절한 자기성찰 위에서 자기가 헌신할 비전과 가치를 명백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저 기득권에 집착해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거나 맹목적 반대라는 비난을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의 실체를 포장하는데 적절치 못하다. 참다운 진보도, 진정한 보수도 우리 국민들의 마음 한 가운데 있을 뿐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여러 모순들을 해결하며 부단히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치와 체제야 말로 참다운 진보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과정, 즉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사를 성공한 역사로 평가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추구해 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면, 그러한 신념은 진정한 보수이자 동시에 진보를 의미한다. 우리의 미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세계화와 지식화에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는 현재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아니라, 역사를 전진시키려는 세력과 역사를 후퇴시키려는 세력이 충돌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참으로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다. 오늘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냉혹한 세계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유럽 사회에서, 그것도 지난 시대에나 통용되던 진보라는 빛바랜 깃발을 가지고는 역사를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후퇴시켜 우리 모두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에 우리 젊은이들이 이 진보라는 허구의 울타리에 더 이상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 젊은이들이 참다운 역사의 진보를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고민할 때가 되었다.
허구의 진보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뭉쳐 싸울 줄 안다. 또 교묘한 위장과 기만에 능하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숨기고 끊임없이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며 한 발짝씩 목표에 접근한다. 그래서 우리는 경각심을 높여 그들과 싸워야 한다. 그들의 정체를 여지없이 폭로하며 무엇이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위한 길인지를 국민들께 확신시켜 주어야 한다. 이 싸움의 승패가 21세기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 기회의 평등, 시장경제, 자주적인 세계화, 지식강국 그리고 이러한 가치 중심의 통일국가 건설이 우리의 미래를 담보한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러한 가치를 위해 우리 모두는 단결하여 싸워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역사의 진보를 이루는 길이다. |
2004. 9. 21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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