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바다와 싸우다(0)
나는 무엇을, 왜, 쓰려하는가?
나는 2004. 5. 17 체포영장에 의해 검찰에 강제 연행되고, 이틀 후인 5. 19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나의 생애에서 대학시절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운동에 헌신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유치장에 갇혀보고, 당시 비밀경찰인 중앙정보부에 두 번이나 끌려가 일주일씩 감금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난 경험은 있지만, 이렇게 정식 사법절차에 의해 구치소에 수감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짧지만 낯선 수감생활에서 나는 날로 새로워지는 나를 발견하며 운명의 신께 감사를 드렸다. 1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서 나는 더 큰 자유의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고, 멀리만 느껴지던 하늘의 뜻(天心)과 국민의 마음(民心)이 내 가슴의 용광로에 하나로 용해되어 타오르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경이로운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나와 꿈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열정, 바로 그것이 나에게 불굴의 용기를 가져다 주었고, 그 용기가 나의 길지 않은 생애를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편견, 독선, 교만 그리고 나태함으로 얼룩진 지난 날의 내 삶에 나의 눈물을 쏟아 부어 때를 씻어낸다. 맑아진 나의 눈은 더 넓고 더 멀리 세계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열린 나의 마음은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모든 변화의 중심을 이루는 민심(民心)의 열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내 내면의 세계에서 그토록 소중하게 가꿔온 ‘자유의지’가 이제 날개를 달고 훨훨 창공을 날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이 축복은 전적으로 ‘꿈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준 선물이다. 나는 그 고마움의 표현으로 어린 시절 공부하던 앉은뱅이 책상을 닮은 밥상 위에서 편지를 썼다. <푸른 물결에 띄우는 편지>를 쓰며 나는 언제나 벅찬 행복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나를 찾아와 격려하여 주신 분들, 정성스럽게 눈물겨운 편지를 써 보내주신 분들, 쉬지 않고 보내온 전자우편(E-mail)에 사랑과 믿음을 듬뿍 담아주신 분들, 내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198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난과 영광을 함께 해온 동지들, 그리고 멀리서 가까이서 시대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숨쉬는 모든 분들에게 나의 작은 마음을 담아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 편지도 7. 21 내가 보석으로 풀려나면서 끝이 났다. 17번째 편지를 쓰다가 내 좁은 방의 문이 열린 것이다. 내 방의 비둘기 부부가 두 번째 알을 품은지 18일 만에 두 알 중 하나의 알에서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나온 날, 나는 정든 비둘기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나는 중단된 17번째 마지막 편지를 나의 서재에서 썼다. 편지는 끝났지만 우리들이 함께 꾸는 꿈은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게 아니라 더 크고 아름답게, 더 높고 뜨겁게 피어오른다.
보라! 바다는 폭풍우에 휩싸여 있다. 폭풍의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꿈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꿈을 꾸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나는 그 싸움의 전선(前線)에 서서 헌신하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며 나의 마땅한 도리이다. 나는 일찍이 뱃사람으로부터 바다의 지혜를 들은 일이 있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예상치 못한 태풍을 만났을 때, 살기 위해 뱃머리를 육지로 향하고 도망치면 반드시 높은 파도에 뒤집히거나 암초에 좌초하여 생명을 잃게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사의 각오로 뱃머리를 태풍이 불어오는 쪽으로 향하고 출력을 최대한 높여 바람과 파도를 치고 나가면 살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말했던가. 필사즉생(必死卽生)이요, 필생즉사(必生卽死)라. 바다에도 그 진리는 그대로 통용되는 모양이다.
2004년 오늘, 우리 사회는 폭풍에 휩싸인 바다와 같다. 치세(治世)인가, 난세(亂世)인가로 묻는다면 열의 여덟은 서슴없이 난세라고 말하리라. 그러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바다의 폭풍도 따지고 보면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원인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결국 소멸의 길을 밟게 된다. 두려워 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이 회오리바람이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것만 같은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힘을 잃어간다. 우리와 우리의 선대들이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더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은 앞날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상황에 직면할 줄을 몰랐던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오늘의 상황이 반드시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쉬지 않고 말해왔다. 역사의 진행에 가정(假定)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미 닥친 폭풍이 우리의 냉엄한 현실일 뿐이다. 이제 싸워 극복하는 길밖에 남은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를 감싸는 두려움과 공포심을 이겨내는 일이 우선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폭풍 또한 사회과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원인이 있고 예상되는 행로가 있으며 일정한 조건이 성취되면 소멸하게 된다.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불안과 공포심은 사라진다. 지혜와 용기로 싸워 이기는 일만 남게 된다.
나는 앞으로 ‘꿈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같이 미쳐 날뛰는 파도와 싸우고 거친 바람을 이겨 나가는 문제에 관하여 말하려 한다. 그리고 그 폭풍의 바다 너머에 펼쳐질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희망과 번영 그리고 통일의 바다를 꿈꾸려 한다.
오, 꿈꾸는 자에게 축복이 있을 진 저! 오, 지혜와 용기로 싸우는 자에게 신의 가호가 있을 진 저!
2004. 8. 1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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