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바다와 싸우다(4)
경제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기업 활력 40년 만에 최저” 오늘 아침 유력 경제 일간지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이어 4면에는 “시장경제 맞나” “뭐가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경제 5단체장과 여당의 회동에서 벌어진 신경전을 묘사하고 있다. 또 얼마 전 이른바 386사람들 때문에 우리 경제가 안 된다는 주장을 폈던 이헌재 경제 부총리가 386출신 의원들이 주선한 자리에 참석하였으나 ‘싱거운 만남’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기사도 보인다.
경제(經濟)란 무엇인가?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일이 곧 경제이다. 꼭 물질적 기초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모든 것이 경제의 목표이다. 오늘 우리 국민들의 생활이 황폐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경제가 잘못되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경제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다. 특히 현대 경제는 대내외적으로 상호의존관계가 한없이 깊어만 간다. 단순하지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어떤 증상(症狀)이 나타나기 전에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대처해 나가는 것이 상책(上策)이다. 증상이 나타난 후 원인을 찾고 처방을 해나갈 때에는 이미 늦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가 허다하다.
그런데 이 정부는 얼마 전만 해도 경제위기를 언급하는 일조차 죄악시하였다. 어디가 아파도 증상을 호소하지 말고 곧 좋아진다는 낙관론에 안주하면 된다고 국민을 기만하였다. 아니 사상 유례가 없는 혹독한 불경기로 고통 받고 있는 국민을 언제까지 속일 수 있다고 믿었는지,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내가 구치소에 갇혀 있을 때 “애덤 스미스 구하기 (Saving Adam Smith)"라는 책을 읽고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자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흥미진진한 구성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는 물론 정부의 간섭이 없는 자유로운 시장을 신봉하는 사람이지만, 경제활동에 있어서 덕목(Virtue)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하는 철학자였다.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시장도 도덕적 긴장이 없다면 결코 정의로운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는 나의 신념을 확인시켜 주었다.
보자! 우리 경제 시장에서 아주 비중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이른바 대선자금 수사를 통하여 기(氣)가 죽어 있었다. 그러다 검찰이 수사를 끝내면서 대기업 총수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그들이 한숨을 돌리게 하였다. 그 일이 있고 바로 얼마 뒤 청와대에서 그 총수들을 불러 모아 무슨 회의를 열었다. 회의가 끝난 후 각 총수들마다 앞으로 얼마를 투자하여 일자리를 몇 개 창출하겠다는 발표를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 모습을 TV와 신문을 통해 보면서 내 눈과 귀를 의심하였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가운데 민간 경제의 최고 경영자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한다는 것도 괴이한 일이려니와 그 자리에서 그 경영자들이 줄줄이 투자계획을 발표하다니! 애덤 스미스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우리나라가 시장경제를 하는 나라가 아니라 무슨 계획경제를 하는 나라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개발경제시대 박정희 전 대통령도 민간 경제지도자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투자계획을 발표하도록 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법이다. 그 때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기업이 경제 논리로 투자를 하는 것인데 권력자 앞에서 약속했다고 실제로 투자를 하겠느냐, 다 쓸 데 없는 짓이다’라고 말하였다. 오늘 아침 신문에 난 것처럼 이 땅의 기업인들은 지금도 정부를 향해 ‘시장경제가 맞느냐’고 질문하고, 정부측 사람들은 ‘기업이 투자 여력이 있으면서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시장 메커니즘은 헛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믿음이 없는 곳에 질서와 활력이 살아날 수 없다.
며칠 전 종로2가 관철동의 커피 집에 간 일이 있다. 무더운 날씨인데도 거리에는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외양으로는 그런 대로 활력이 넘친다. “장사가 어떠세요?” 내가 물었다. “모두 다 관철동 생긴 이래 이런 불경기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사장이 답변을 하는데 마침 동석하고 있던 건물의 주인이 “지금까지 이 건물에 세를 얻으려면 기다려야 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세 든 사람이 나가겠다고는 하는데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이런 일은 지난 30년 동안 처음 있는 현상입니다.” 라며 한숨을 짓는다.
해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이가 65만명 정도이다. 이들 가운데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아 희망을 키우는 젊은이는 얼마나 될까.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으나 아무리 관대하게 계산해도 반을 넘지 못할 것이다. 벌써 몇 해째 이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가?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간다. 아마 놀고 있는 젊은이가 없는 가정이 없을 것이다. 젊은이가 몇 년간 놀게 되면 후일 경제가 좋아져 일자리가 생겨도 그 젊은이는 갈 곳이 없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본인은 물론이고 그 가족의 절망이 커진다. 어디 젊은이뿐인가. 실업이 확대되고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장애인들이 실업의 고통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중소기업들의 해외이전, 폐업, 도산이 줄을 잇는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직면하는 것은 미리 꺼내 쓴 카드 빚을 갚지 못해 발생하는 신용파탄이다. 벌써 400만 명이 신용파탄에 이르렀는데 재취업의 길이 막혀 있으니 그 질곡에서 헤어날 길이 막막할 뿐이다. 그러니 소비수요는 점점 활력을 잃어 갈 수 밖에 없다. 요즘 우리나라가 일본과 같은 장기 불황으로 가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참으로 잘못된 비유이다. 일본 국민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주머니는 가득 차 있는데 그 주머니를 풀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주머니가 텅텅 비거나 아예 빚에 쪼들려 있어 소비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불황을 몰고 오는 원인에 있어서 차원이 다른 것이다.
1997년 우리 경제에 일대 위기가 폭발하였다. 사람들은 그 때 그 위기를 6. 25 이래 최대의 국난이라고 말하였다. 외국 금융기관들이 우리 금융기관에 대한 신용을 회수하는 바람에 외환 쇼크가 일어난 것이다. 경제를 운용하는 관료들은 물론이고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도 쇼크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위기의 실체를 경고하는 전문가도, 기관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무지몽매한 국가경영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경제가 어떤 위기를 향해 가고 있는지 정확히 진단하여 경고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저 위기다, 큰일 났다, 하는 소리만 무성하다. 이러다 어느 날 또 무슨 사태에 직면할지 마음이 어둡기만 하다.
투자, 고용, 생산, 소득, 소비의 선순환(善循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업은 투자를 기피하고, 고용은 이루어지지 않아 실업은 확대되고, 생산과 소득은 감소되고, 소비는 따라서 위축되는 악순환(惡循環)이 계속되면,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 위기는 폭발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기는 97년 외환분야의 쇼크 정도가 아니고 경제의 뿌리가 썩어 나무 전체가 붕괴되는 무서운 재앙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되면 외환위기 때 국제사회의 협력을 얻어 위기를 극복했던 때와는 달리 위기극복의 방도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97년 위기를 극복하면서 우리가 지불한 대가가 얼마인가. 하지만 새로이 터질지 모르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지불해야 할 대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또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도 아르헨티나, 칠레 등 남미국가와 같은 경제파탄으로 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이 또한 적절한 비유가 되지 못한다. 그들 나라들은 광대한 국토를 갖고 있어 식량 걱정이 없다. 에너지자원도 넘치는 나라이다. 경제가 무너져도 불을 켜고,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칼로리의 70%를 수입에 의존한다. 에너지의 100%를 달러를 주고 사와야 한다. 경제가 무너져 내리면 불을 켜고 먹고사는 문제가 터진다. 문명이 파괴되는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 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미리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 병(病)을 고쳐야 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기업이 희망을 갖고 투자하고, 돈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꿈을 좇아 사업을 벌이도록 해야 한다. 국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땀 흘려 일하고 거기에서 행복한 삶의 터전을 마련토록 해주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세금도 많이 걷히게 되고, 정부는 이 돈으로 복지, 교육, 연구개발, 전략분야 등 사회통합과 미래를 위한 투자를 감당한다. 자,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즉, 시장을 믿고 존중하면 될 일이다. 애덤 스미스까지 올라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정부의 간섭이나 무분별한 개입은 시장에 독(毒)이 될 뿐이다. 정부는 시장에 넓은 자유를 보장하고, 공정한 경쟁의 틀과 합리적인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관리하면 된다. 다만 스미스가 말한 덕목, 즉 시장에 도덕적 긴장이 유지되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정작 정부가 할 일은 경제주체들이 시장에서 더 높은 가치를 창조할 수 있도록 우수한 인적, 물적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이다. 교육, 환경, 문화, 복지는 물론 안보와 사회의 안전에 이르기까지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정부가 경쟁력 있는 시장을 위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 보도처럼 경제인들은 시장경제를 존중하라고 요구하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냐고 따지는 것을 보면, 이 간단한 해답이 힘을 얻을 날이 요원하지 않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참으로 큰일이다. 아니, 시장의 주인공들이 불평을 말하지 않을 때까지 정부의 간섭과 개입을 없애고 시장의 환경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면 될 일인데, 그들과 논쟁하고 싸워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여, 그대들이 단 한 사람도 먹여 살릴 힘이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돈과 재능 있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사업을 벌여야 고용, 생산, 소득, 소비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이 간단한 진리에 눈을 감고 있는 한 아무도 현재 진행 중인 이 악순환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런데 국가 경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정부, 여당은 요즘 온 국민을 몰고 과거로 가려 한다. 국정의 파트너인 야당마저 적당히 그 논쟁에 끼어들려 하고 있다. 한쪽은 친일(親日)의 그림자를 추적하고, 다른 한쪽은 친공(親共)의 그림자를 추적하겠다며 벼른다.
그 작업이 경제에 무슨 도움이 될까. 백해무익(百害無益)이다. 필경 이 작업은 사회의 분열을 몰고 오며, 그 불안정은 경제에 독이 될 것이다. 경제가 파탄되고 민생이 수렁에 빠진 다음, 그 정쟁으로 어느 정파가 이익을 얻어 어디에 쓰려는가.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이다.
저 봉건시대, 당파싸움을 할 때 정적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했다는 역사를 배웠지만,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세기가 다 지난 과거를 파헤치겠다는 정권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없다. 외세에 빌붙어 반역한 자들을 조사하는 것은 처벌을 통해 청산할 경우에만 하는 일임을 왜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역사를 바로 잡아 쓰는 일이 어떻게 권력의 몫이란 말인가. 경제야 망가지건 말건 그들이 이 일을 벌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으리라 짐작한다.
오, 해마다 찾아오는 태풍의 경우에도 그 진행 상황과 위력을 쉬지 않고 예보하며 미리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하는데, 이 닥쳐오는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대하여는 정확한 예보를 하려는 노력도, 그 위기의 폭발을 막아내려는 긴장도 찾아보기 어려우니,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제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 경제활동을 한다.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늘은 우리 국민을 도울 것이라 확신한다.
얼마 전, 한 언론인이 나에게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해준 말이 떠오른다. “이제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요. 하나는 기도하는 것이고, 둘은 지혜를 모으는 일이며, 셋은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 국민 모두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지혜를 모으며, 또 용기 있게 행동하면, 우리에게 이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2004. 8. 20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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