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바다와 싸우다(3)
광복(光復)의 아침에 통일(統一)을 생각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은 지 꼭 59주년이 되는 아침이다. 나는 해방 이후에 태어났지만 나의 부모님은 일제 때 태어나 젊은 날을 그 혹독한 압제 밑에서 고생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날의 기쁨을 체험으로 알지 못하나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간간이 전해들은 바 있어, 광복절 이날이 오면 진정 해방의 희열을 온 몸으로 느낀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은 잠시, 우리 민족은 해방의 공간에서 너무나 가혹한 시련에 직면한다. 2천년 가까이 계속된 봉건체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고, 치욕의 식민지배가 36년간 이어지다가, 미소 양대 세력에 의해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붕괴되어 우리 민족은 하루아침에 해방을 맞게 된다. 한반도에는 일시적으로 지배세력도, 지배가치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상태가 도래(到來)한다. 외세에 의해 사라진 전(前) 근대(近代)로부터 다리도 없는 단절의 강을 건너 근대로 나아가도록 우리 민족이 내몰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진공(眞空)은 필연적으로 폭풍을 몰고 온다. 핵폭탄이 폭발하면 거대한 진공이 생기고, 그 진공을 메우기 위해 거대한 폭풍이 뒤따른다. 상당한 피해가 이 폭풍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역사의 법칙 또한 이 물리의 법칙과 다르지 않다. 해방 후 우리 민족이 맞게 되는 사상과 세력간의 투쟁과 혼란은 따라서 역사의 필연이었던 셈이다. 길게 보면 그 투쟁과 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무래도 통일이 되고 통합이 완결되어야만 끝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 다시 통일을 생각한다. 이 부질없는 투쟁과 혼란을 하루 빨리 종식(終熄)시키는 길은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재 진행중인 통일의 전선(前線)은 안개 속에 갇혀 있다. 그 안개 속에 전선은 혼란에 빠져 있고, 그 혼란을 틈타 조국과 민족의 이익에 반역하는 무리들이 의도를 숨긴 채 역량을 키워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안개를 밀어내고 전선의 대오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통일에 대한 그릇된 믿음들이 통일의 전선에 안개를 드리우고 있다. 그러므로 그릇된 믿음들을 버리고 과학적이며 이치에 순응하는 믿음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 순간 안개는 사라지고 반역의 무리들도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나쁜 버릇일수록 버리기 쉽지 않다. 믿음도 나쁜 것일수록 바꾸는데 거센 저항이 따른다. 그러나 잘못된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로, 통일은 민족 구성원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집권세력간의 협상으로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전쟁이 아닌 평화통일의 경우에 말이다. 그러면 테이블 위에서는 무엇을 협상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민족 구성원이 통일의 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조건을 놓고 부지런히 협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테이블 위에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북(北)이야 세습체제요, 전체주의체제이니 그렇다 치고, 남(南)에서는 집권기간이 길어야 5년이고 자유민주주의체제인데도 같은 궤도에서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통일의 주체가 우리 민족이지 남과 북의 집권세력이 아니라는 전제(前提) 위에 서야한다. 북에는 크게 세 개의 실체가 있다. 하나는 북의 주민이며, 다른 하나는 북의 체제이고, 마지막은 그 체제를 움직이는 북의 지배계층이다. 이 세 개의 실체를 모두 부정하거나 적대하고 무관심한 것이 바로 냉전적 사고이다. 이 사고는 이제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 세 개의 실체 가운데 체제나 지배계층만 의식하고 이를 상대하여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태도는 순리가 아니며 위험하기 짝이 없다. 통일은 우리 민족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과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북의 당국과 대화하고 협상할 때 그 시작과 끝은 언제나 북의 주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최근 북이 트집잡고 있는 탈북 난민의 입국문제나 미 의회의 북한인권법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명쾌해진다. 북의 경제발전과 인권문제 개선을 위한 개방과 개혁을 어떻게 요구하고 관철해 나갈 것인지도 방향이 잡히게 될 것이다.
지금 통일정책을 이끄는 노 정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북의 주민을 최우선 가치에 놓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극비리에 금년 가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비밀리에 추진할 일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평양에 갔으니 북이 서울에 오면 될 일이다. 그리고 정상회담이 열리면, 두 정상은 오직 민족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면 된다. 남과 북의 주민들이 더 자유와 번영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고, 하루 빨리 통일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조건을 성숙시켜주면 될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통일은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북이 이른바 ‘고려연방제’를 주장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통일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남북 양 체제의 영구화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남북의 완전한 통일은 먼 후대에게 맡기자고 그들 스스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남에서도 ‘고려연방제’ 주장에 대응하여 마치 남북 당국자들이 국가연합에 이르는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虛構)이다. 이미 남북 예멘이 허구임을 실증해 주지 않았던가. 노파심으로 말하지만, 비밀리에 추진하는 정상회담에서 정도(正道)를 벗어난 합의를 하게 된다면 중대한 사태에 직면할 것임을 경고해 둔다.
둘째로, 통일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통일이 빠를수록 통합에 이르는 비용은 적게 들고, 통합을 통해 얻는 이익은 크다. 이것이 과학이다. 그런데 이 땅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너무나 많은 국민들이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심리상태에서 통일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대내적으로는 분단 위에서만 자기의 기득권을 누릴 수 있다는 냉전적 사고, 그리고 사회주의 몰락 과정에서 북의 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좌파적 사고가 그 의식의 원천이다. 대외적으로는 우리의 통일을 두려워하고 반대하는 일본의 우파세력이 보이지 않게 조직적으로 빠른 통일이 한국을 고통에 빠뜨릴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근거를 만들어 왔다. 뒤에 말하겠지만 전혀 비과학적인 이른바 ‘통일비용’ 이론을 만들어 한국 언론을 통해 유포시켜 온 세력이 일본이다.
앞서 말한 대로 통일은 민족 구성원의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독일의 경우처럼 언제 어떤 형태로 올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이런 통일의 순간이 빨리 올 때, 먼저 수습하기 어려운 대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독일은 1989년 정말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통일의 순간을 맞았다. 하루에도 많을 때는 수만 명씩 동독의 젊은이들이 서독으로 일자리를 찾아 내려왔다. 그러나 극복하지 못할 혼란은 없었다. 통일을 이룬지 15년이 지나고 있지만, 독일의 통합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왔다. 통일 당시 5분의 1에 불과하던 동독 지역 주민들의 소득은 이제 서독 지역 주민들 소득의 90%에 이르고 있다.
심리적 갈등을 말하는 이도 있으나, 생각해 보자! 이 문제는 언제이고 통일이 된 후 한 세대가 지나야 완전히 극복되는 문제이다. 빨리 통일이 되어야 빨리 해결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과도한 통일비용이 드는데 우리 경제가 이것을 감당할 수 없고, 또 북의 못사는 주민들을 먹여 살리려면 우리의 국민소득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지 않겠느냐고 걱정한다. 그러니 북이 어느 정도 잘사는 단계에 가서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의 여러 분야를 통합하다 보면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의 호주머니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은 북의 주민에 대한 사회보장을 위한 비용 정도이다. 이것은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통일 당시 서독은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제도를 운용하면서 동서독간의 사회보장 통합을 1:1로 강행하였다. 이를 위하여 서독 주민들은 소득세를 1% 더 부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통합 과정에서 서독지역 주민들의 소득이 단 1마르크도 감소한 일이 없다. 우리나라가 통일되더라도 남한 주민들의 소득이 줄어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머지 통일 정부가 낙후된 북한 지역에 도로, 항만, 공항, 학교, 발전소 등 인프라를 건설하는데 드는 비용은 엄격히 말해 ‘비용’이라기보다 ‘투자’이다. 따라서 꼭 세금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으며, 그 투자는 더 큰 경제발전으로 직결되기 마련이다. 1998년으로 기억된다. 프레스쎈터에서 개최된 통일 관련 국제 심포지움에 참석한 일이 있다. 주제는 “왜 한국은 통일이 안 되는가”였다. 그때 나는 당시 주한 독일 대사 클라우스 폴러스(Klaus Vollers)의 기조연설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왜 한국인들이 통일비용을 겁내는지 모르겠다며 조목조목 통일비용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아, 어쩌면 평소 나의 생각과 저리도 똑같단 밀인가! 그런데 불행히도 그 자리에 참석한 저명한 인사들은 그의 주장에 별로 공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끝으로 국제사회, 특히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우리의 통일을 방해하지 않고, 또 그럴 권리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일본을 제외한 국제사회는 우리의 통일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협력해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많은 지도자들과 국민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2001년의 일로 기억된다. 부시 대통령이 집권한 해이다. 그의 아버지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서울에 와서 연설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나의 남은 생애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 그의 재임 중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우리와는 달리 독일 통일은 미, 영, 불, 소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반대하는 대처 영국 총리,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머뭇거리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설득해 독일 통일을 찬성하도록 만든 인물이 바로 부시 대통령이었다.
또 리펑(李鵬) 중국 전인대 상임위원장은 서울을 방문한 자리에서 “하나의 민족이 인위적으로 분단되어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한반도의 통일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일본 모리(森) 수상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통일된 한반도는 강대한 국가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것으로 후일 보도되었다.
통일은 곧 우리가 잘사는 번영의 길이다. 비용의 허구성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통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이익을 가져다준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곤경도 통일 상황이 온다고 가정하면 일거에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폭발적인 투자수요가 창출되고, 이것이 막혀버린 경제의 순환을 되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분단을 관리하는데 얼마나 많은 소모적인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가. 이것이 일시에 사라지면 그만큼 우리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 통일은 우리 민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지 무슨 권력자나 당(黨)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보다 고양된 제도와 체제로 나아가는 것이 곧 통일이다. 그러므로 통일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낡아빠진 혁명의 이념이나, 모두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체제나, 사회를 분열과 대립으로 몰고 가는 계급적 사고로는 진정한 통일을 이루어낼 수 없다. 이러한 퇴영적 이념, 체제, 사고는 아직도 한반도에서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기승을 부린다. 바로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새로운 문명의 흐름을 수용하는 고양된 체제를 향하여 통일의 결단을 내린다는 믿음을 가질 때, 통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우리 민족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 민족의 통일이 주변 나라는 물론 국제사회의 이익에도 기여하며 따라서 국제사회로부터 협력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통일의 전선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안개를 몰아내고 마침내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
오늘 광복의 아침, 일제 식민지배가 만들어 낸 분단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 조국을 생각한다. 전후 4개의 분단국가 중 유일하게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를 고뇌한다.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진정한 광복의 아침은 밝아 올 것이다.
2004. 8. 15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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