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R후보를 처음 본 것은 지방자치단체장선거가 한창이던 6월 어느 일요일 집 근처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던 선거유세장에서였다.

선거 유세장 같은 곳은 좀처럼 가지 않았던 내가 R후보의 선거유세장을 찾아갔던 이유는 당시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명도를 갖고 있는 정치인이 내가 근무하고 있는 도청의 단체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궁금증과 그가 5공 청문회 스타라는 강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당시 R후보는 이미 광주 5공 청문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 정치인이었고 문민정부에서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노동부장관을 하면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켜 온 그런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이런 R후보의 선거유세장에 가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내가 현장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많은 유권자들이 모여 그의 선거유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당 후보들과 맞서는 선거유세가 아님에도 꽤나 많은 유권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그들도 나처럼 R후보의 유명세에 관심을 갖고 나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인기 있는 정치인임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하였다.

유세장에 나온 많은 유권자들 중에서는 특히 평소 내가 객지에 나와 알고 지내온 C지방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 통닭집 주인, 그리고 부동산 중개인등 주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었으나 이들의 고향은 모두 R후보 같은 C지방 사람들임이 틀림없었다.

『어이! 자네 정말 오래간만이구먼..』
『이번 민선도지사는 OOO를 뽑아줘야 되는 거여』
『이 사람이 5공 청문회 때 전OO를 혼내준 그 사람 아닌감?』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사투리는 내가 어느 지방의 초등학교 운동장에 와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이날 유세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화제는 단연코 R후보와 관련된 5공 광주청문회 이야기였다. 5공 광주청문회와 관련된 R후보의 이미지는 젊은 사람이 아주 당차게 정치군인들을 혼내 주었다는 평이었다.

내 기억으로도 당시 R후보가 속한 야당 국회의원들은 다른 어느 야당의 국회의원들보다도 두드러진 청문회활동을 통하여 국민들의 뇌리에 크게 각인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R후보의 청문회 활동은 당시 많은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이때부터 “청문회스타”라는 애칭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이날 선거유세장에는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보고 들어왔던 L모, K모 같은 지명도 높은 여당 국회의원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지역출신 L모 국회의원은 5,6공 시절 여당의 사무총장과 총무까지 지낸 막강한 권력의 실세였음에도 이날은 선거유세장에 나와 R후보가 도착하기 전 분위기를 잡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 5.6공 시절 명성을 날리던 분의 격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정치현실이지만 그것이 또 그분들이 가야 할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L의원이 유세분위기를 잡고 다른 장소로 떠나자마자 이번에는 곧바로 이날의 주인공인 R후보가 등장하였다.

“ 이OO, 이OO.이....." 지지자들의 연호가 유세장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았다.

시끄러웠지만 처음 보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R후보가 단상위로 올라왔다. 작은 키에 다부진 몸매, 그리고 5공 청문회 때 TV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친애하는 도민여러분! 그리고 당원동지 여러분! 저는 당이 일방적으로 저를 도지사후보로 지명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당 일각에서는 제가 경선에서 패할 수 도 있으니 안전하게 지명을 받아 도지사 후보가 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저는 단호히 거절하고 끝까지 당당하게 경선을 하여 도지사후보가 되었습니다.』
R후보의 연설은 계속 되었다.

『저는 여당 사상처음으로 경선을 통해 도지사 후보가 되었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꼭 본선에서 민선도지사로 당선되겠습니다.』

R후보의 연설내용은 자신이 경선을 통해 도지사 후보가 되었다는 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사실 당시 R후보와 경쟁을 벌였던 전직 관선도지사 출신의 I씨는 경선 후 이에 불복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끝내 고배를 들고 말았다. R지사의 열정적이고 단호한 연설에 대하여 많은 청중들이 반응하였다.

작은 키에 다부진 몸매, 우렁찬 목소리에 현란한 수식어나 지루한 정치용어 하나 사용하지 않고 토해내는 R후보의 연설에 나 자신도 빠져 드는 듯 하였다.

이날 R후보의 인상 깊은 연설과 함께 또 하나 나의 눈길을 끈 일은 동행한 부인의 행동이었다. R후보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연단 위에 앉아 있던 여성 한 분이 단상 밑으로 내려와 땅 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청중들에게 절을 하였다. 사회자가 R후보의 부인이라고 소개하여 주었다.

한 여성이 맨땅에 갑자기 엎드려 큰절을 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로서 많은 청중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청중들의 힘찬 박수 소리가 분위기를 잘 증명해 주었다. 단상에서는 후보가, 단하에서는 부인이 멋진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듯 하였다. 부인의 이날 행동은 맨땅위에서의 큰절뿐만 아니라 선거운동을 하는 여러 가지 행동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 OOO 후보를 잘 부탁합니다. 제가 OOO 안사람입니다.』

남편의 이름을 친구처럼 부르거나 후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는 모습들이 그랬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부인을 잘 만나야 되는 거여.』

여기저기에서 청중들의 덕담이 오고 갔다. 두 분은 유세가 끝난 뒤에도 계속 운동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유권자들과 악수를 나누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도 두 분과 악수를 나누었다. R후보와 나눈 강한 악수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남긴 유세장의 하루였다.


사이언스 | 등록 2007/11/17 18:02



Posted by 뉴스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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