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 부는 바람(2)


거산(巨山)과 거인(巨人)


 큰 산(巨山)에 오를 때 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느끼게 된다.     산은 말없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준다. 정상에 올라 발아래 도회(都會)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우리가 또 얼마나 무모하게 인생을 살아가는지 깨닫게 된다. 물론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느 사이 세파(世波)에 파묻혀버리지만 말이다.


 나는 며칠 전 거산(巨山)의 팔순(八旬) 축하모임에 참석해 말석을 지킨 일이 있다. 내가 정치에 입문한지 꼭 20년이 되었는데 처음 10년은 거산의 문하에서 성장하였다. 그 때 함께 정치하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권좌(權座)를 떠난 지 10년. 그래도 거산을 만나러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친다. 요즘과 달리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가 말한다.  “나는 감히 고백하거니와 한 인간으로서 비겁하게 살지 않았다”,  “나는 사사로운 이익을 탐해 본 일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니 큰 산을 오를 때처럼 나 자신이 너무나 작아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나는 정치 초년 시절 대변인을 하면서 1년 가까이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관찰한 경험이 있다. 


 나는 단 한번도 그가 자세를 흩트리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그는 언제나 당당하였다. 당당함이란 도덕적으로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미덕이다. 역사 앞에서, 동지 앞에서 그리고 시대의 요구 앞에서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였다.

 그의 고백을 들으며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거산(巨山) 안에 있을 때  산의 크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거인(巨人)의 품 안에 있을 때 얼마나 큰 인물인지를 느끼지 못하였던 것은 아닐까!


 나는 새삼스럽게 이 시대의 한 거인을 마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지난 시절 그로부터 정치를 배우고 역사의 물결을 헤쳐 나온 일이 한없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관대한 마음으로, 그러나 자신에게는 너무나 엄격한 자세로, 사람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었던 거인!  아, 언제나 청년 같던 그가 이제 팔순을 맞이하다니,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게 된다.


 그는 거듭 거듭 위대한 국민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고난과 영광을 함께했던 동지들에게도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였다.      그리고 지난 세월 민주주의가 상처를 입을 때의 고통을 떠올리며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노구를 이끌고라도 언제든지 투쟁에 나서겠다는 결의를 다짐하였다.

 한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노병(老兵)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외친 맥아더를 연상하였다.


 엄혹하기만 했던 독재의 어둠을 뚫고 민주주의의 아침을 열었던 거인 김영삼!  역사의 지평에서 거산처럼 우뚝 솟아 영원한 민주주의의 이정표(里程標)로 남을 것이다.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시기를!



2008.  1.  14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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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와 싸우다(6)

한강은 흐른다


  성큼 가을이 다가왔다. 하늘은 높아지고, 바람은 상큼해진다. 아침 약속이 없는 날이면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한다. 집 앞에서 탄천(炭川, 성남 방면에서 흘러와 올림픽 경기장 앞에서 한강으로 합류되는 지천)으로 나오면 국회의사당까지 자전거 전용도로가 막힘없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이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흐르는 한강과 나의 몸이 하나가 되는 기분에 젖는다.  소리 없이 도도하게, 유유히 흐르는 한강! 그 한강과 일체가 되는 희열에 피로를 느끼지 않고 여의도에 진입한다.

  한강 고수부지 곳곳에 비둘기들이 무리지어 먹이를 좇는다. 언제 보아도 비둘기는 그 부드러운 자태로 평화 그 자체를 상징한다. 번영, 평화, 하나 되는 통일! 소리 없이 흐르는 한강과 강변을 노니는 비둘기, 그리고 풍요로운 결실을 재촉하는 따가운 햇살의 가을 하늘! 이 위대한 자연의 앙상블 속을 질주하다 보면, 우울했던 마음은 어느새 희망으로 채워진다.

  아, 내가 구치소 독방의 창가에서 부화와 성장을 도우며 함께 지냈던 비둘기 가족은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고독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나라는 60, 70년대 눈부신 산업화의 성공을 이룬다. 세계가 모두 인정하는 경제 성장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이 승전한 영국과 프랑스를 따돌리며 비약적인 경제부흥을 이루자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했는데, 따지고 보면 한강의 기적이 훨씬 더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은 비록 잿더미가 되었지만 산업사회의 전통과 훈련된 국민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한강의 기적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진정한 의미의 기적일 것이다.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할 때, 라인강은 무슨 의미로 쓰일까? 내가 독일 사람들로부터 들은 바는 이렇다. 라인강은 자연의 수로로서 통일 전 서독의 물류를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었다. 화물 물동량은 거의 60%를 감당했다고 하니 믿기 어렵다. 이렇게 건설비도, 유지비도 필요없는 천혜의 자연 수로인 라인강 덕분에 기적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후 독일의 경제 기적은 라인강이 가져다 준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때 한강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눈부신 경제 성장의 기적을 만들어 낸 우리 ‘국민’ 또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상징한다. 저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는 우리 민족의 숨어있던 웅혼의 기상이 폭발하고, 저 유유히 흐르는 강물 속에 녹아 있는 우리 국민의 열정과 근면함이 충일(充溢)한 결과, 기적같은 산업화의 성공이 가능했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도 한강은 흐른다. 한반도가 만들어진 그 날부터 지구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한강은 쉬지 않고 흐른다. 인류가 창조되면서부터 이 유역에 터전을 잡고 살아 온 우리 민족 또한 끝없이 문명을 진화시키면서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온 인류가 기적이라고 칭송하는 산업화의 기적을 만들어 낸 역사를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며 흐를 것이다. 그런데 이 자랑스러운 성공의 역사를 지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모두 아는 바대로 급속한 산업화의 그늘은 독재였다. 그러나 그 독재가 내세우는 명분은 경제성장이요, 자유민주주의이며 시장경제였다. 인민을 굶겨 죽이고 권력을 세습하면서 이미 실패한 이상(理想)으로 판명이 난 낡은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는 북의 이념독재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산업화의 성취와 더불어 민주화의 역량을 키웠고, 투쟁을 통해 마침내 민주주의의 지평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하나의 조건 또는 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 질서, 문화, 가치 등 알맹이를 채우고 발전시켜 나갈 때,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국민의 행복은 증진된다.

  이렇게 우리의 현대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취하는 놀라운 성공의 역사이다. 다만, 민주화를 이끌어 온 세력이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한 1993년 이래 새로운 국가의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탁월한 전략을 세워 단합된 국민의 힘으로 이를 추진해 왔느냐이다. 누구도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하리라. 오히려 절망하며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생각해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나 또한 엄중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어디에 그 원인이 있을까.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독재가 사라지면서 끝이 난다. 더 이상 싸울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미래를 위해 창조와 개척의 투쟁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난 민주화 정권들은 사라진 독재의 그림자와 싸웠고, 미래의 목표를 세우고 전략을 마련하는 데 게을렀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국가위기를 불러온 근본 원인이다.

  그것도 모자라 현 정권은 아예 성공의 현대사를 주도해 온 모든 세력을 ‘시대를 거꾸로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매도하고, 이들을 무대에서 밀어내지 않으면 경제성장은 해서 무엇하느냐며 날을 세운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독재와 권위주의의 그림자와 전쟁을 선포하며, 나아가 이미 화석화 된 일제시대 역사까지 파헤치려 한다.

  산업화의 역사뿐만 아니라, 건국의 역사까지도 송두리째 부정해버리겠다고 작심한 것이다. 성공한 역사를 발판으로 미래를 향해 질주해도 선진국의 견제와 후발국의 추격에 고전을 면치 못할 판인데, 과거를 향해 돌진하며 내부의 분열과 대결을 고취하니, 오, 나라의 장래는 어찌되는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예견된 것이었고, 필연이었다. 나는 2002년 경선 당시부터 국민들에게 오늘의 운명을 말씀드리며 호소하지 않았던가. 오늘 보도를 보니, 국가의 원로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친북 반미 세력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내가 얼마나 소리쳐 경고했던가. 친북 반미 세력은 안보를 무너뜨리고, 급진좌파는 경제를 붕괴시켜, 국가를 재앙에 몰아넣을 것이라고. 늦었지만, 그래도 성공의 현대사를 이끌어 온 원로들이 국민과 역사 앞에 용기 있게 올바른 말씀을 해 주셔서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넓게 보자. 개인이나, 회사나, 국가의 진운에 우여곡절은 있는 법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도 그 원인을 우리 사회 안에서  키워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극복하면 될 일이다. 극복은 부드럽지만 빠르게 해야 한다. 저 유장하게 흐르는 한강을 보라.  부드럽다.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쉬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대해에 합류한다.

  오늘 우리에게 직면한 이 역사의 도전에 당황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국민 아닌가. 권력은 국민이 위임한 것이다. 권력은 국민이 세우고 국민이 허문다. 우리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이 국민의 위대한 주권으로 계속하여 시대에 맞는 권력을 세워 왔다. 권력이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주권자를 배반할 때, 국민의 위대한 힘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대사는 그리하여 쉬지 않고 진화를 거듭할 수 있었다.

  한강의 기적! 그 한강이 소리 없이 흐른다. 위대한 국민의 힘이 넘친다. 무서운 주권자의 결단이 일렁인다. 역사를 두려워하라! 나는 한강을 달리며 온 몸으로 오늘을 받아들인다. 한강은 말한다. 또 한번의 기적이 필요하다고. 번영과 통일의 시대를 열기 위한 또 한번의 기적! 그 기적을 위해 오늘의 시련은 약이 될 수 있다고!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침묵으로 던지는 소리에 나의 마음도 흠뻑 젖는다.


2004.  9.  10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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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와 싸우다(5)

국가보안법, 주한미군, 주적론 그리고 역사


   인간의 몸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곳은 어디일까? 아마 두뇌일 것이다. 사람의 사고와 판단, 즉 생각을 담당하는 기관이 두뇌 아닌가. 생각은 유연하고 탄력적이어야 한다. 경직되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뒤쳐지게 된다. 그러고 보면 신(神)이 두뇌를 가장 부드러운 조직으로 만든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자유를 최고의 덕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사상의 자유를 존중한다. 다른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경제 등 사회과학의 분야에서도 끝없이 새로운 변화를 흡수하며 새로운 꿈과 비전을 제시해 나가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국가보안법, 주한미군, 주적론 그리고 우리의 근대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봇물을 이룬다.

   나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사고(思考)하며 자신의 입장을 자유로이 표현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고는 부드러운 두뇌가 하지만, 그 두뇌를 무엇이 둘러싸고 있는가?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두개골이 가장 부드러운 두뇌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잘못하면 두뇌가 손상되어 사고 그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적 상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연구 단계를 지나 실천의 영역에 이르면 사상의 자유를 감싸는 어떤 틀에 의해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 틀은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이며, 우리나라가 근거하는 정통성과 정체성이다. 물론 시대를 초월하는 영구불변의 가치나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다.

   며칠 전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건의하고, 다음 날에는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상의 말썽 많은 찬양고무죄가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폐지를 추진하는 여당 안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한번 자유로이 상상해 보자. 이 법은 물론 분단과 냉전의 산물이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성 있는 국가이고, 북한은 이를 부정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이다. 해방 이후 냉전이 격화되면서 적어도 70년대 말까지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세(勢)를 키워 나갔다.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의 공세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될 현실적 필요성이 높았다.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이 법이 유지되었다.

물론 이 법은 본래의 목적에만 동원되지 않고 역대 독재 정권들이 정권 유지를 위해 남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작용이고 그림자였지,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의 목적이 정당성을 잃거나 그 실체를 부정당할 수는 없다.  

    그러면 지금 국가보안법이 사라져야 할 만큼 시대상황이 변화했는가. 물론 범지구적으로 보면 냉전은 해체되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큰 위협은 소멸된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반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사람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군사적 대치와 긴장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북이 핵을 개발하면서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동북아 정세 전체를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객관적 사실은 누구나 인정해야 한다. 정치, 경제 등 비 군사 분야에서의 화해와 협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더라도, 여기에서 막바로 현존하는 위협에 눈을 감는 것은 지혜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큰 화를 자초할 우려가 높다. 만사는 불여튼튼이라 한다. 하물며 안보에 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한반도의 정세와 남북관계의 변화가 본질적으로 이루어지면 국가보안법은 한 시대의 유물로 역사의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역대 독재 정권들이 이 법을 남용함으로써 아무 이유 없이 고통을 받으셨던 분들에 대하여는 심심한 위안의 말씀을 드린다. 국가는 그 고통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성의를 다해야 한다. 아직도 시대상황과 남북관계의 현실이 이 법의 존립을 요구하고 있다면, 인권유린이라는 과거의 악몽 때문에 이 법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문민정부 이래 민주주의 정권에서 이 법의 남용으로 인권이 유린되는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해석의 차이로 사상의 자유를 불필요하게 제한하고 이로 인해 인권이 침해당할 우려가 있는 이른바 독소조항은 개정되어야 한다.


   주한미군 철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명분은 미국의 해외주둔미군재배치 일환이라고 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사전에 한국정부와 충분히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국 국민들이 의아해 하는 가운데 급속하게 철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것은 노 정권이 말리기보다는 오히려 당연시하고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쉬지 않고 철수를 주장하던 평양이 막상 철수가 이루어지니 당황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인가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나 우리의 국익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미국의 유명한 한반도 전문가 부르스 커밍스 교수가 한반도의 미군주둔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수정주의 사관의 주창자로서 이 땅의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든든한 배경이었고, 과거 한반도로부터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해온 사람이다. 그는 말한다. 시대상황의 변화로 이제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미군의 주둔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깊이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시점에서 적어도 유연하게 생각을 바꾸고 있다.

   주한미군은 한미동맹의 상징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현실적인 힘이다. 이것이 필요 없다면 모르지만, 필요하다면 이 정권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그들은 침묵하며 속으로는 사태의 발전을 즐긴다. 내세우는 것이 자주(自主)인데, 그러면 대규모의 미군 주둔을 허용하는 일본과 독일은 자주를 외면하는 나라인가.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사건은 터지게 되어 있다. 이제 누구를 믿겠는가. 우리 국민들이 냉철한 이성으로, 무서운 눈으로, 슬기롭게 대처하는 길 밖에 없다.

   주적론(主敵論)에 관하여 논쟁이 끊이지 않더니 국방부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면서 요즘은 논쟁 자체가 없다. 대한민국의 70만 대군은 어디를 향하여 총을 들고 있는가. 북의 110만 대군의 총구는 또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얼마 전 서해상에서 경계를 침범한 북의 경비정을 대포를 쏘아 물리친 우리 군에 대해 이 정권이 서슬 퍼렇게 몰아붙이던 일을 잊지 못한다. 결국 그 일로 우리 국방장관과 3성장군의 목이 달아났다. 현실을 외면하고 환상을 쫒으면 나라의 안보를 지킬 수 있는가. 나는 물론 군사적 대치와 긴장의 완화를 지지한다. 군축을 비롯한 군비통제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하고 핵을 개발하는 것은 북이지 우리가 아니다. 무엇에 쫓겨서 주적론을 폐지하고 군의 사기와 정신무장을 와해시키는 것인지 묻는다.

   앞에서 말한 국가보안법, 주한미군, 주적론은 사실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이다. 북은 끊이지 않고 이 법을 폐지하고, 미군을 철수하고, 주적론을 없애라고 주장해 왔다. 북의 대남 전략에서 보면 적어도 이 세 가지 주제는 하나의 패키지인 셈이다. 북은 왜 그런 전략을 구사할까. 진정한 평화, 화해와 협력을 원해서일까. 아무리 관대하게 해석하려 해도 그것은 현실도 아니요, 과학도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고 불신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 전략의 의도는 다른데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이 세 가지 주제에 대하여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번영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나아가 북의 전략 전술에 말려드는 것은 더욱 안 된다.

   강물은 자유롭게 흐르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둑을 넘거나 역류하도록 방치하면 재앙이 닥친다.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 주제에 대한 논의와 실천은 국가의 번영과 통일이라는 목표를 일탈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1988년 당시 통일민주당을 대표하여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대체입법을 주장한 일이 있다. 당시는 1978년부터 중국이 현대화를 향한 개방과 개혁을 가속화하고,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고 있었다. 동구 공산주의도 급격히 붕괴되면서 사회주의 진영이 근본적으로 모습을 달리 하던 때이다. 그런데 당시 북의 개방과 개혁이라는 변화를 위해서 우리의 역량이 들어갈 통로가 국가보안법에 의해 완전히 막혀있는 실정이었다. 지금은 남북교류협력법이 만들어져 이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정세는 우리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지 않았다. 북은 핵을 개발하면서 정세를 더욱 긴장시키고, 남에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위협하는 세력이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폐지를 서두를 때가 아니라, 필요한 부분의 개정을 생각할 때라고 믿는다.

   권력은 미래를 향해 역사를 창조해야지, 지난 역사를 다시 쓰고 자기의 관점에서 평가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금기(禁忌)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정권은 지금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이고 있다. 어찌하면 좋을까. 나는 지금 그들에게 “역사를 두려워하라,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국가보안법, 주한미군, 주적론은 어제와 오늘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일 한반도의 운명에 크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내일의 역사가 어떻게 결정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대한민국이 나의 조국인가, 우리 국민이 빈곤과 독재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추구해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우리의 희망은 전체주의에 있는가 아니면 민주주의에 있는가.

   불행히도 뻔히 답이 정해져 있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오늘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가슴 속에 확신을 키워야 한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해 번영을 이루며 민족의 대통합으로 위대한 조국을 건설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는 사회를 발전시키며, 그러기 위해서는 결코 전체주의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이러한 신념에 도달하면 오늘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여러 문제들은 모두 올바른 방향으로 풀리게 되리라 믿는다.



2004.   8.   30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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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와 싸우다(4)

경제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기업 활력 40년 만에 최저”  오늘 아침 유력 경제 일간지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이어 4면에는 “시장경제 맞나”  “뭐가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경제 5단체장과 여당의 회동에서 벌어진 신경전을 묘사하고 있다. 또 얼마 전 이른바 386사람들 때문에 우리 경제가 안 된다는 주장을 폈던 이헌재 경제 부총리가 386출신 의원들이 주선한 자리에 참석하였으나 ‘싱거운 만남’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기사도 보인다.

  경제(經濟)란 무엇인가?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일이 곧 경제이다. 꼭 물질적 기초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모든 것이 경제의 목표이다. 오늘 우리 국민들의 생활이 황폐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경제가 잘못되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경제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다. 특히 현대 경제는 대내외적으로 상호의존관계가 한없이 깊어만 간다. 단순하지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어떤 증상(症狀)이 나타나기 전에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대처해 나가는 것이 상책(上策)이다. 증상이 나타난 후 원인을 찾고 처방을 해나갈 때에는 이미 늦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가 허다하다.

  그런데 이 정부는 얼마 전만 해도 경제위기를 언급하는 일조차 죄악시하였다. 어디가 아파도 증상을 호소하지 말고 곧 좋아진다는 낙관론에 안주하면 된다고 국민을 기만하였다. 아니 사상 유례가 없는 혹독한 불경기로 고통 받고 있는 국민을 언제까지 속일 수 있다고 믿었는지,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내가 구치소에 갇혀 있을 때 “애덤 스미스 구하기 (Saving Adam Smith)"라는 책을 읽고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자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흥미진진한 구성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는 물론 정부의 간섭이 없는 자유로운 시장을 신봉하는 사람이지만, 경제활동에 있어서 덕목(Virtue)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하는 철학자였다.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시장도 도덕적 긴장이 없다면 결코 정의로운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는 나의 신념을 확인시켜 주었다.

보자! 우리 경제 시장에서 아주 비중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이른바 대선자금 수사를 통하여 기(氣)가 죽어 있었다. 그러다 검찰이 수사를 끝내면서 대기업 총수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그들이 한숨을 돌리게 하였다. 그 일이 있고 바로 얼마 뒤 청와대에서 그 총수들을 불러 모아 무슨 회의를 열었다. 회의가 끝난 후 각 총수들마다 앞으로 얼마를 투자하여 일자리를 몇 개 창출하겠다는 발표를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 모습을 TV와 신문을 통해 보면서 내 눈과 귀를 의심하였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가운데 민간 경제의 최고 경영자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한다는 것도 괴이한 일이려니와 그 자리에서 그 경영자들이 줄줄이 투자계획을 발표하다니! 애덤 스미스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우리나라가 시장경제를 하는 나라가 아니라 무슨 계획경제를 하는 나라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개발경제시대 박정희 전 대통령도 민간 경제지도자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투자계획을 발표하도록 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법이다. 그 때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기업이 경제 논리로 투자를 하는 것인데 권력자 앞에서 약속했다고 실제로 투자를 하겠느냐, 다 쓸 데 없는 짓이다’라고 말하였다. 오늘 아침 신문에 난 것처럼 이 땅의 기업인들은 지금도 정부를 향해 ‘시장경제가 맞느냐’고 질문하고, 정부측 사람들은 ‘기업이 투자 여력이 있으면서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시장 메커니즘은 헛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믿음이 없는 곳에 질서와 활력이 살아날 수 없다.

  며칠 전 종로2가 관철동의 커피 집에 간 일이 있다. 무더운 날씨인데도 거리에는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외양으로는 그런 대로 활력이 넘친다. “장사가 어떠세요?”  내가 물었다. “모두 다 관철동 생긴 이래 이런 불경기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사장이 답변을 하는데 마침 동석하고 있던 건물의 주인이 “지금까지 이 건물에 세를 얻으려면 기다려야 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세 든 사람이 나가겠다고는 하는데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이런 일은 지난 30년 동안 처음 있는 현상입니다.” 라며 한숨을 짓는다.  

해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이가 65만명 정도이다. 이들 가운데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아 희망을 키우는 젊은이는 얼마나 될까.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으나 아무리 관대하게 계산해도 반을 넘지 못할 것이다. 벌써 몇 해째 이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가?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간다. 아마 놀고 있는 젊은이가 없는 가정이 없을 것이다. 젊은이가 몇 년간 놀게 되면 후일 경제가 좋아져 일자리가 생겨도 그 젊은이는 갈 곳이 없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본인은 물론이고 그 가족의 절망이 커진다. 어디 젊은이뿐인가. 실업이 확대되고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장애인들이 실업의 고통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중소기업들의 해외이전, 폐업, 도산이 줄을 잇는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직면하는 것은 미리 꺼내 쓴 카드 빚을 갚지 못해 발생하는 신용파탄이다. 벌써 400만 명이 신용파탄에 이르렀는데 재취업의 길이 막혀 있으니 그 질곡에서 헤어날 길이 막막할 뿐이다. 그러니 소비수요는 점점 활력을 잃어 갈 수 밖에 없다. 요즘 우리나라가 일본과 같은 장기 불황으로 가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참으로 잘못된 비유이다. 일본 국민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주머니는 가득 차 있는데 그 주머니를 풀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주머니가 텅텅 비거나 아예 빚에 쪼들려 있어 소비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불황을 몰고 오는 원인에 있어서 차원이 다른 것이다.

  1997년 우리 경제에 일대 위기가 폭발하였다. 사람들은 그 때 그 위기를 6. 25 이래 최대의 국난이라고 말하였다. 외국 금융기관들이 우리 금융기관에 대한 신용을 회수하는 바람에 외환 쇼크가 일어난 것이다. 경제를 운용하는 관료들은 물론이고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도 쇼크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위기의 실체를 경고하는 전문가도, 기관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무지몽매한 국가경영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경제가 어떤 위기를 향해 가고 있는지 정확히 진단하여 경고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저 위기다, 큰일 났다, 하는 소리만 무성하다. 이러다 어느 날 또 무슨 사태에 직면할지 마음이 어둡기만 하다.

  투자, 고용, 생산, 소득, 소비의 선순환(善循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업은 투자를 기피하고, 고용은 이루어지지 않아 실업은 확대되고, 생산과 소득은 감소되고, 소비는 따라서 위축되는 악순환(惡循環)이 계속되면,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 위기는 폭발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기는 97년 외환분야의 쇼크 정도가 아니고 경제의 뿌리가 썩어 나무 전체가 붕괴되는 무서운 재앙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되면 외환위기 때 국제사회의 협력을 얻어 위기를 극복했던 때와는 달리 위기극복의 방도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97년 위기를 극복하면서 우리가 지불한 대가가 얼마인가. 하지만 새로이 터질지 모르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지불해야 할 대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또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도 아르헨티나, 칠레 등 남미국가와 같은 경제파탄으로 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이 또한 적절한 비유가 되지 못한다. 그들 나라들은 광대한 국토를 갖고 있어 식량 걱정이 없다. 에너지자원도 넘치는 나라이다. 경제가 무너져도 불을 켜고,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칼로리의 70%를 수입에 의존한다. 에너지의 100%를 달러를 주고 사와야 한다. 경제가 무너져 내리면 불을 켜고 먹고사는 문제가 터진다. 문명이 파괴되는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 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미리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 병(病)을 고쳐야 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기업이 희망을 갖고 투자하고, 돈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꿈을 좇아 사업을 벌이도록 해야 한다. 국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땀 흘려 일하고 거기에서 행복한 삶의 터전을 마련토록 해주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세금도 많이 걷히게 되고, 정부는 이 돈으로 복지, 교육, 연구개발, 전략분야 등 사회통합과 미래를 위한 투자를 감당한다. 자,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즉, 시장을 믿고 존중하면 될 일이다. 애덤 스미스까지 올라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정부의 간섭이나 무분별한 개입은 시장에 독(毒)이 될 뿐이다. 정부는 시장에 넓은 자유를 보장하고, 공정한 경쟁의 틀과 합리적인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관리하면 된다. 다만 스미스가 말한 덕목, 즉 시장에 도덕적 긴장이 유지되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정작 정부가 할 일은 경제주체들이 시장에서 더 높은 가치를 창조할 수 있도록 우수한 인적, 물적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이다. 교육, 환경, 문화, 복지는 물론 안보와 사회의 안전에 이르기까지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정부가 경쟁력 있는 시장을 위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 보도처럼 경제인들은 시장경제를 존중하라고 요구하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냐고 따지는 것을 보면, 이 간단한 해답이 힘을 얻을 날이 요원하지 않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참으로 큰일이다. 아니, 시장의 주인공들이 불평을 말하지 않을 때까지 정부의 간섭과 개입을 없애고 시장의 환경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면 될 일인데, 그들과 논쟁하고 싸워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여,  그대들이 단 한 사람도 먹여 살릴 힘이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돈과 재능 있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사업을 벌여야 고용, 생산, 소득, 소비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이 간단한 진리에 눈을 감고 있는 한 아무도 현재 진행 중인 이 악순환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런데 국가 경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정부, 여당은 요즘 온 국민을 몰고 과거로 가려 한다. 국정의 파트너인 야당마저 적당히 그 논쟁에 끼어들려 하고 있다. 한쪽은 친일(親日)의 그림자를 추적하고, 다른 한쪽은 친공(親共)의 그림자를 추적하겠다며 벼른다.

  그 작업이 경제에 무슨 도움이 될까. 백해무익(百害無益)이다. 필경 이 작업은 사회의 분열을 몰고 오며, 그 불안정은 경제에 독이 될 것이다. 경제가 파탄되고 민생이 수렁에 빠진 다음, 그 정쟁으로 어느 정파가 이익을 얻어 어디에 쓰려는가.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이다.

   저 봉건시대, 당파싸움을 할 때 정적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했다는 역사를 배웠지만,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세기가 다 지난 과거를 파헤치겠다는 정권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없다. 외세에 빌붙어 반역한 자들을 조사하는 것은 처벌을 통해 청산할 경우에만 하는 일임을 왜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역사를 바로 잡아 쓰는 일이 어떻게 권력의 몫이란 말인가. 경제야 망가지건 말건 그들이 이 일을 벌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으리라 짐작한다.

  오, 해마다 찾아오는 태풍의 경우에도 그 진행 상황과 위력을 쉬지 않고 예보하며 미리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하는데, 이 닥쳐오는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대하여는 정확한 예보를 하려는 노력도, 그 위기의 폭발을 막아내려는 긴장도 찾아보기 어려우니,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제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 경제활동을 한다.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늘은 우리 국민을 도울 것이라 확신한다.

  얼마 전, 한 언론인이 나에게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해준 말이 떠오른다. “이제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요. 하나는 기도하는 것이고, 둘은 지혜를 모으는 일이며, 셋은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 국민 모두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지혜를 모으며, 또 용기 있게 행동하면, 우리에게 이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2004.   8.   20

이     인     제



Posted by 뉴스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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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와 싸우다(3)

광복(光復)의 아침에 통일(統一)을 생각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은 지 꼭 59주년이 되는 아침이다. 나는 해방 이후에 태어났지만 나의 부모님은 일제 때 태어나 젊은 날을 그 혹독한 압제 밑에서 고생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날의 기쁨을 체험으로 알지 못하나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간간이 전해들은 바 있어, 광복절 이날이 오면 진정 해방의 희열을 온 몸으로 느낀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은 잠시, 우리 민족은 해방의 공간에서 너무나 가혹한 시련에 직면한다. 2천년 가까이 계속된 봉건체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고, 치욕의 식민지배가 36년간 이어지다가, 미소 양대 세력에 의해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붕괴되어 우리 민족은 하루아침에 해방을 맞게 된다. 한반도에는 일시적으로 지배세력도, 지배가치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상태가 도래(到來)한다. 외세에 의해 사라진 전(前) 근대(近代)로부터 다리도 없는 단절의 강을 건너 근대로 나아가도록 우리 민족이 내몰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진공(眞空)은 필연적으로 폭풍을 몰고 온다. 핵폭탄이 폭발하면 거대한 진공이 생기고, 그 진공을 메우기 위해 거대한 폭풍이 뒤따른다. 상당한 피해가 이 폭풍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역사의 법칙 또한 이 물리의 법칙과 다르지 않다. 해방 후 우리 민족이 맞게 되는 사상과 세력간의 투쟁과 혼란은 따라서 역사의 필연이었던 셈이다. 길게 보면 그 투쟁과 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무래도 통일이 되고 통합이 완결되어야만 끝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 다시 통일을 생각한다. 이 부질없는 투쟁과 혼란을 하루 빨리 종식(終熄)시키는 길은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재 진행중인 통일의 전선(前線)은 안개 속에 갇혀 있다. 그 안개 속에 전선은 혼란에 빠져 있고, 그 혼란을 틈타 조국과 민족의 이익에 반역하는 무리들이 의도를 숨긴 채 역량을 키워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안개를 밀어내고 전선의 대오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통일에 대한 그릇된 믿음들이 통일의 전선에 안개를 드리우고 있다. 그러므로 그릇된 믿음들을 버리고 과학적이며 이치에 순응하는 믿음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 순간 안개는 사라지고 반역의 무리들도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나쁜 버릇일수록 버리기 쉽지 않다. 믿음도 나쁜 것일수록 바꾸는데 거센 저항이 따른다. 그러나 잘못된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로, 통일은 민족 구성원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집권세력간의 협상으로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전쟁이 아닌 평화통일의 경우에 말이다. 그러면 테이블 위에서는 무엇을 협상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민족 구성원이 통일의 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조건을 놓고 부지런히 협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테이블 위에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북(北)이야 세습체제요, 전체주의체제이니 그렇다 치고, 남(南)에서는 집권기간이 길어야 5년이고 자유민주주의체제인데도 같은 궤도에서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통일의 주체가 우리 민족이지 남과 북의 집권세력이 아니라는 전제(前提) 위에 서야한다. 북에는 크게 세 개의 실체가 있다. 하나는 북의 주민이며, 다른 하나는 북의 체제이고, 마지막은 그 체제를 움직이는 북의 지배계층이다. 이 세 개의 실체를 모두 부정하거나 적대하고 무관심한 것이 바로 냉전적 사고이다. 이 사고는 이제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 세 개의 실체 가운데 체제나 지배계층만 의식하고 이를 상대하여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태도는 순리가 아니며 위험하기 짝이 없다. 통일은 우리 민족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과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북의 당국과 대화하고 협상할 때 그 시작과 끝은 언제나 북의 주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최근 북이 트집잡고 있는 탈북 난민의 입국문제나 미 의회의 북한인권법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명쾌해진다. 북의 경제발전과 인권문제 개선을 위한 개방과 개혁을 어떻게 요구하고 관철해 나갈 것인지도 방향이 잡히게 될 것이다.

지금 통일정책을 이끄는 노 정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북의 주민을 최우선 가치에 놓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극비리에 금년 가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비밀리에 추진할 일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평양에 갔으니 북이 서울에 오면 될 일이다. 그리고 정상회담이 열리면, 두 정상은 오직 민족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면 된다. 남과 북의 주민들이 더 자유와 번영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고, 하루 빨리 통일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조건을 성숙시켜주면 될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통일은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북이 이른바 ‘고려연방제’를 주장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통일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남북 양 체제의 영구화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남북의 완전한 통일은 먼 후대에게 맡기자고 그들 스스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남에서도 ‘고려연방제’ 주장에 대응하여 마치 남북 당국자들이 국가연합에 이르는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虛構)이다. 이미 남북 예멘이 허구임을 실증해 주지 않았던가. 노파심으로 말하지만, 비밀리에 추진하는 정상회담에서 정도(正道)를 벗어난 합의를 하게 된다면 중대한 사태에 직면할 것임을 경고해 둔다.

둘째로, 통일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통일이 빠를수록 통합에 이르는 비용은 적게 들고, 통합을 통해 얻는 이익은 크다. 이것이 과학이다. 그런데 이 땅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너무나 많은 국민들이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심리상태에서 통일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대내적으로는 분단 위에서만 자기의 기득권을 누릴 수 있다는 냉전적 사고, 그리고 사회주의 몰락 과정에서 북의 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좌파적 사고가 그 의식의 원천이다. 대외적으로는 우리의 통일을 두려워하고 반대하는 일본의 우파세력이 보이지 않게 조직적으로 빠른 통일이 한국을 고통에 빠뜨릴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근거를 만들어 왔다. 뒤에 말하겠지만 전혀 비과학적인 이른바 ‘통일비용’ 이론을 만들어 한국 언론을 통해 유포시켜 온 세력이 일본이다.

앞서 말한 대로 통일은 민족 구성원의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독일의 경우처럼 언제 어떤 형태로 올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이런 통일의 순간이 빨리 올 때, 먼저 수습하기 어려운 대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독일은 1989년 정말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통일의 순간을 맞았다. 하루에도 많을 때는 수만 명씩 동독의 젊은이들이 서독으로 일자리를 찾아 내려왔다. 그러나 극복하지 못할 혼란은 없었다. 통일을 이룬지 15년이 지나고 있지만, 독일의 통합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왔다. 통일 당시 5분의 1에 불과하던 동독 지역 주민들의 소득은 이제 서독 지역 주민들 소득의 90%에 이르고 있다.

심리적 갈등을 말하는 이도 있으나, 생각해 보자! 이 문제는 언제이고 통일이 된 후 한 세대가 지나야 완전히 극복되는 문제이다. 빨리 통일이 되어야 빨리 해결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과도한 통일비용이 드는데 우리 경제가 이것을 감당할 수 없고, 또 북의 못사는 주민들을 먹여 살리려면 우리의 국민소득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지 않겠느냐고 걱정한다. 그러니 북이 어느 정도 잘사는 단계에 가서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의 여러 분야를 통합하다 보면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의 호주머니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은 북의 주민에 대한 사회보장을 위한 비용 정도이다. 이것은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통일 당시 서독은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제도를 운용하면서 동서독간의 사회보장 통합을 1:1로 강행하였다. 이를 위하여 서독 주민들은 소득세를 1% 더 부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통합 과정에서 서독지역 주민들의 소득이 단 1마르크도 감소한 일이 없다. 우리나라가 통일되더라도 남한 주민들의 소득이 줄어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머지 통일 정부가 낙후된 북한 지역에 도로, 항만, 공항, 학교, 발전소 등 인프라를 건설하는데 드는 비용은 엄격히 말해 ‘비용’이라기보다 ‘투자’이다. 따라서 꼭 세금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으며, 그 투자는 더 큰 경제발전으로 직결되기 마련이다. 1998년으로 기억된다. 프레스쎈터에서 개최된 통일 관련 국제 심포지움에 참석한 일이 있다. 주제는 “왜 한국은 통일이 안 되는가”였다. 그때 나는 당시 주한 독일 대사 클라우스 폴러스(Klaus Vollers)의 기조연설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왜 한국인들이 통일비용을 겁내는지 모르겠다며 조목조목 통일비용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아, 어쩌면 평소 나의 생각과 저리도 똑같단 밀인가! 그런데 불행히도 그 자리에 참석한 저명한 인사들은 그의 주장에 별로 공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끝으로 국제사회, 특히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우리의 통일을 방해하지 않고, 또 그럴 권리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일본을 제외한 국제사회는 우리의 통일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협력해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많은 지도자들과 국민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2001년의 일로 기억된다. 부시 대통령이 집권한 해이다. 그의 아버지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서울에 와서 연설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나의 남은 생애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 그의 재임 중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우리와는 달리 독일 통일은 미, 영, 불, 소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반대하는 대처 영국 총리,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머뭇거리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설득해 독일 통일을 찬성하도록 만든 인물이 바로 부시 대통령이었다.

또 리펑(李鵬) 중국 전인대 상임위원장은 서울을 방문한 자리에서 “하나의 민족이 인위적으로 분단되어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한반도의 통일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일본 모리(森) 수상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통일된 한반도는 강대한 국가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것으로 후일 보도되었다.

통일은 곧 우리가 잘사는 번영의 길이다. 비용의 허구성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통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이익을 가져다준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곤경도 통일 상황이 온다고 가정하면 일거에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폭발적인 투자수요가 창출되고, 이것이 막혀버린 경제의 순환을 되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분단을 관리하는데 얼마나 많은 소모적인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가. 이것이 일시에 사라지면 그만큼 우리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 통일은 우리 민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지 무슨 권력자나 당(黨)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보다 고양된 제도와 체제로 나아가는 것이 곧 통일이다. 그러므로 통일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낡아빠진 혁명의 이념이나, 모두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체제나, 사회를 분열과 대립으로 몰고 가는 계급적 사고로는 진정한 통일을 이루어낼 수 없다. 이러한 퇴영적 이념, 체제, 사고는 아직도 한반도에서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기승을 부린다. 바로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새로운 문명의 흐름을 수용하는 고양된 체제를 향하여 통일의 결단을 내린다는 믿음을 가질 때, 통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우리 민족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 민족의 통일이 주변 나라는 물론 국제사회의 이익에도 기여하며 따라서 국제사회로부터 협력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통일의 전선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안개를 몰아내고 마침내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

오늘 광복의 아침, 일제 식민지배가 만들어 낸 분단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 조국을 생각한다. 전후 4개의 분단국가 중 유일하게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를 고뇌한다.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진정한 광복의 아침은 밝아 올 것이다.



2004. 8. 15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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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할머니는 전쟁 때의 이야기며, 중견 탤런트인 강부자씨가 옛날 함께 살았는데 얼마 전 만났던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려 주셨다.

“할머님, 130세까지 건강하게 살으셔서 우리들의 자랑이 되어 주세요”

내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할머니는 뜻밖에도 “글세 130을 더 살을지 못 살을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사는데까지 사는거지” 이렇게 대답을 하신다.

순간 나를 비롯하여 우리 일행들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 어른께 오래 오래 살으시라고 덕담을 하면 대개는 지금까지도 오래 살았는데 더 오래 살면 무엇을 하느냐, 빨리 죽어야지,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이 할머님은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며느님께도 많은 것을 여쭈어 보았다. 모두 4남 1녀를 두었는데 결혼한 후 각자 나가 살고 있고 이렇게 할머니를 모시고 구멍가게를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유옥녀라며 웃는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송옥례라고 한다. 할머니의 이름이 “옥녀”라! 옥녀봉 밑의 옥녀! 나는 문득 그 어떤 숙명의 끈이 이 두 여인과 옥녀봉의 두 느티나무 사이에 단단히 묶여있다는 영감에 사로잡혔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옥황상제의 딸 옥녀가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하다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올라오라는 부름을 받고 올라가게 되었는데, 급한 나머지 그만 앞가슴을 내놓고 옥황상제 앞에 나서게 되었다. 이를 본 상제께서 화가 난 나머지 거울 하나만을 주며 땅에 내려가 살도록 명령을 내렸고, 옥녀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울다 이곳에서 죽게 되었는데 그녀가 가지고 있던 거울은 바위로 변하여 옥녀봉 바로 밑의 용영대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두 여인이 그 쌓이는 연륜, 불변의 효심으로 분명 먼 훗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나갈 전설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아름다운 고부간의 사랑과 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 아름다운 전설이 만들어지고 있다!

두 여인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시 옥녀봉 정상에 오른다. 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낀다. 금강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원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 오른다. 이렇게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은 이어져 가고 있구나!

옥녀봉을 내려와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나는 상념에 잠겼다. 나의 소년 시절, 잠시도 쉬지 않고 가족을 위해 일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봄이면 밀짚모자의 재료가 되는 밀대를 따가지고 내다 팔았는데 밀짚모자 공장이 강경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짠 밀대를 머리에 가득 이고 이 강경까지 나오시곤 하셨다.

연산 집에서 강경까지는 줄잡아 12km가 넘는다. 언제나 걸어다니셨으니 왕복 24km이다.
밀대를 판 돈으로 강경의 명물인 황새기 젓갈을 사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 대지와 같은 여인의 위대함이여!


200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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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달린다.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에서 강변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강남구 자곡동의 집까지 약 24km를 달린다. 작년 연말부터 골프를 멀리하고 자전거 타기를 시작했는데 정말 좋은 운동이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중소기업의 최고경영자 두 분이 꼭 자전거를 타보라고 권유해 온 것이다. 자기들도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그토록 즐기던 골프를 거의 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분들의 말이 틀린 소리가 아니다. 자전거의 매력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오늘은 마침 저녁 약속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일찍 퇴근을 하기로 하였다.

한강은 흐른다. 민족의 혼이 용해되어 흐르는 강이다. 태백준령으로부터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황해에 이르는 강. 소리없이 흐르는 강물 속에서 거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살아 온 선인들의 숨결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때마침 서풍이 불어 물결이 서에서 동으로 굽이친다. 마치 강물이 나와 함께 동쪽을 향해 흐르는 것만 같다. 그러나 한갓 바람이 어떻게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으리요. 한강은 여전히 황해를 향해 서쪽으로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을.

그러므로 바람에 흔들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흐름의 본질을 놓치고 표면의 현상에 매몰되어 사태를 잘못 판단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 시대의 진운을 거꾸로 가려다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던 구한말의 어리석은 역사. 한강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 어리석음을 결코 되풀이 하지 말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만 같다.

세계는 빠른 속도로 하나가 되어가고, 인간의 창조적 역량이 폭발한다. 그리하여 지구촌 시대가 열리고, 지식문명의 시대가 밝아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을 떨치고 문을 활짝 열어 세계로 나가야 한다. 권력은 개입의 유혹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무한의 자유를 허용하며 그들이 도전과 개척의 전선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과연 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일까.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강물 여기 저기 위로 점점이 이름 모를 철새들이 무리지어 먹이를 찾고 있다. 강가의 모래톱에는 오리떼들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다. 어디에서 날아 온 새들일까.

나는 지난 해 바이칼 호수를 여행한 일이 있다. 몽골의 울란바투르를 거쳐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마침내 꿈에 그리던 바이칼의 품에 안기었다. 징기스칸의 어머니 허엘룬이 태어나 성장한 아론 섬에서 하루 밤을 보낸 것이다. 지구 총 담수의 20%를 담고 있다는 바이칼의 위용 앞에             압도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가장 깊은 곳이 1800m가 넘는 이 호수의 파도는 바다 못지 않게 높고 거칠기만 하다. 그래서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일체 배의 출항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호수도 혹독한 시베리아의 추위에는 견디지 못하고 긴 겨울 동안 꽁꽁 얼어붙게 마련이다. 얼음의 두께가 1m 50cm에 이르기 때문에 대형 트럭들이 호수 위를 질주한다고 한다. 그러니 시베리아의 새들이 그 긴 겨울 동안 먹이를 찾아 이 곳 한강을 찾아 왔으리라.


한강에 철새들이 많이 몰려 올수록 그만큼 먹이 감이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지난 40여년 동안 한강의 생태계는 얼마나 긴고통의 터널을 달려 왔을까. 이제 한강은 다시 생명이 넘치는 강으로 태어나야 한다.

즐비한 새들의 무리를 바라보며 생명의 냄새를 맡는다. 비싼 값의 깨비아가 철갑상어의 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철갑상어가 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이 한강을 회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경기지사로 일할 때 상어만을 박제하는 전문가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연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본 멋진 철갑상어의 박제가 바로 60년대 초 한강에서 잡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한 2년 전 쯤인가, 나는 한 텔레비전 프로에서 철갑상어의 치어가 한강에서 잡혔다는 보도를 접하고 잔잔한 흥분을 느낀 일이 있다.

그렇다. 이제 한강을 생명이 충만한 강으로 만들어나가야지. 철갑상어가 회유하고 온갖 생태계가 복원되도록 해야지. 앞으로는 더 이상 자연이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지. 나는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중얼 중얼 생각을 이어 갔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도심의 미로가 아닌 강을 따라 달리다 보니 생명의 신비와 경외를 저절로 깨닫게 된다.

한강을 달린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문명의 숲이 보일 뿐이다.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는 도시의 빌딩들, 그리고 강변 좌우를 달리는 끝없는 자동차의 물결. 한강을 달리며 자연의 위대함과 생명의 신비함을 호흡한다. 문명의 탁류속을 숨가쁘게 살아가며 우리들이 잊고 있었던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말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으로부터 자연과 조화하는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말 그대로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출발한지 한시간 쯤 지나자 잠실종합체육관이 눈 앞에 보인다. 왼 쪽으로 탄천을 따라 달리면 탄천 본류와 양재천의 합류지점이 나온다. 종전처럼 탄천 본류를 따라 가기로 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비포장 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비가 온데다 공사 차량들이 다니면서 길을 온통 진흙탕으로 만들어 놓았다. 도저히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다. 다시 돌아나와 양재천을 따라 큰 길로 올라 선다. 그리고 보도를 달려 집에 도착하니 세상은 어두움에 싸이고 온 몸은 땀으로 젖어 있다. 몸과 마음이 새처럼 가벼워진다. 참으로 상쾌한 퇴근길이다.



200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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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재촉하는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대지 깊은 곳에서 성장을 준비해 온 생명들에게 은총처럼 스며들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라. 온 세상을 푸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두 주일 동안 지역구 주민들을 찾아뵙고 돌아와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 창문을 연다. 2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이다. 이미 겨울의 냉기는 사라지고 봄의 온기가 온 몸에 느껴진다. 하지만 멀리 남한산의 정상에는 하얀 눈이 보인다. 비에 젖은 대지와 눈 덮인 산의 정상이 참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내와 나는 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나는 자동차 운전을 좋아하여 주말이면 가급적 직접 핸들을 잡는다. 옆에 앉은 아내와 함께 두 딸이 어렸을 때 뒷좌석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나서면 언제나 잠을 자던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에 잠긴다. 우리는 그 때 그 길을 따라 가고 있다. 성남에서 남한산성을 넘어 광주로 나간다. 광주시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좌로 방향을 틀면 팔당호와 천진암으로 가는 길이다. 특별히 목적지를 정한 것도 없다. 우리는 한국 천주교가 100년의 계획으로 세우고 있는 대성당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문득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기지사로 일하면서 이곳을 두 차례 방문하였는데, 그 때 우리나라도 이제 100년 단위의 사업을 추진할 정도로 성숙하고 큰 나라가 되었구나 하면서 자부심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비가 내린 탓인지 이 날에는 참배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100년의 역사라, 아직도 80년 이상이 남아 있다. 5년여만에 다시 찾아 왔지만 그리 큰 진전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 1m인 화강석 24만 개를 사용한다고 하니 과연 얼마나 웅장한 건축물이 될 것인가. 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필적할 수 있을까. 나는 어린애 같은 호기심에 빠진다. 아, 80년 후면 우리 부부는 물론 내 두 딸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오는데 군데군데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 점심때가 되어서인지 더욱 또렷이 보인다. 그런데 그 간판들 중에 “돼지 고추장 숫불구이”라는 간판이 많이 있다.             나는 유난히 돼지고기를 고추장에 발라 구운 음식을 좋아한다. 아내도 가끔 이 요리를 하여준다. 나의 형수님들은 옛날 학창시절 내가 형님 댁에 간다고 하면 아예 이 음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셨다.                                    

시내에서는 이런 음식을 파는 집을 구경하기 어려웠는데 이곳에서는 이 요리가 인기 있는 메뉴임이 분명한 것 같다. 배도 고프고 호기심도 동하여 전통이 있어 보이는 한 집을 찾아 들었다. 1인분에 11,000원 하는 돼지고기 2인분을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한다.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여성이다. 내가 지사로 일할 때부터 너무 잘 알고 있다며 반가와 한다.

내가 말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손님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적군요.”
“예, 오늘 날씨가 흐려서 야외로 많이 나오지 않으셨나 봐요. 요즘 경기가 너무 나빠요.”
주인 아주머니는 아주 걱정 어린 표정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매상이 과거 이맘때쯤보다 얼마나 줄었나요?” “매상은 한 3분의 1정도 줄었는데 그것도 문제지만 더 골치 아픈 문제가 있답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근심과 걱정으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아니, 매상이 뚝 떨어지는 일보다 더 걱정되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긴장하며 주인의 설명을 들었다. 요즘엔 도대체 일할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한 달에 100만원을 주었는데 사람이 없어 120만원으로 올렸어도 일 할 아주머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 불법체류자를 모두 내보내면 이 음식점도 문을 닫아야 할 실정이란다.

“아주머니들은 다 어디로 가셨나요?” 나는 다시 물었다. “잘 모르지만 무슨 노래방에 가서 일을 하면 힘도 들지 않고 수입이 많아서 이렇게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답니다.” 주인의 대답을 들으며 그것이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지 내 마음도 무거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얼마 전 논산에서 만난 보험설계사 아주머니 한 분이 “이제 우리나라는 망했습니다” 라고 거침없이 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분의 설명은 농촌의 노인 어른들까지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들고 나와 로또 복권을 사기 위해 끝없이 줄을 서 있는 나라가 어떻게 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땀흘려 일하며 보람을 느끼고, 그렇게 하여 번 소중한 돈으로 알뜰하게 살아가는 정신이 뿌리 채 뽑혀 나가고 있다. 아, 어찌하다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왔는가. 국가를 경영해 보겠다고 나선 정치인으로서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식당주인 아주머니와 보험설계사 아주머니가 이렇게 절규하는데 막상 나라를 이끄는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참 숯에서 타오르는 파란 불꽃이 향기롭다. 거기에 익혀 먹는 고추장을 바른 빨간 돼지고기가 더없이 맛있다. 음식이 참으로 정갈하고 정성이 담겨 있다.

아내와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인 아주머니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도 나누었다. 아내는 옛날 숯불로 밥을 짓던 생각을 했는지 앞으로는 집에서도 가끔씩 숯을 쓰고 싶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아주머니가 떠나려는 우리에게 숯을 한 상자 들고 달려온다.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숯 값을 아주머니의 손에 쥐어드리고 그 집을 떠날 즈음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늦은 점심을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200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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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의 대표단을 이끌고 비극의 현장을 찾은 것은 사고 후 이틀이 지난 20일 낮이다.               

희생자 유가족들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신 채 더 이상 오열할 기운조차 보이지 않는다. 위로의 말을 전하는 나의 손을 잡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딱히 드릴 말씀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실종자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은 또 얼마나 오죽하랴.

그분들의 회의에 한동안 자리를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종자의 사망확인 절차가 신속하게 또 똑바로 진행되는지 가족들이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타당한 요구라 판단되어 배석한 책임자로부터 약속을 받아 주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채 연기에 질식되고 천도가 훨씬 넘는 고열에 녹아 이슬처럼 스러져 갔는지, 아직도 내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내가 경기지사가 된지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용인의 가출소녀 수용시설에서 몇 명의 소녀가 탈출을 노리고 방화를 하였는데 그만 20여명의 소녀들이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하고 연기에 질식되어 사망하였다. 그 때 일이 악몽처럼 떠올려진다.

또 임진강이 범람하여 연천과 문산이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발생하였을 때, 그래도 인명피해가 없어 얼마나 하늘에 감사를 드렸던가. 범람이 밤에 시작되었더라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연천은 아침에, 문산은 오후 3시에 침수가 시작되어 사람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던 기억이 새롭다.

우선 차량의 내장을 왜 불연물질이 아닌 유독성의 가연물질로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수출용 차량은 불연재를 사용하여 제작하는데 국내용 차량도 이렇게 했더라면 이런 참화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도를 보니 가격이 세배 비싸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시민의 생명의 가치는 어떻다는 것인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의 무게보다도 더 무겁고 고귀한 가치를 갖는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자동 정전이 되고, 암흑 속에서 잠긴 문을 열 수가 없었다는데, 이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안전 시스템이 이런 수준이라니 부끄러울 뿐이다.

결국 이번의 참화는 한 광인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이를 막지 못한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이 사회를 안전하게 관리해야 할 사람들의 그릇된 가치관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 자신부터 깊은 자책감을 억누를 수 없다.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이다! 이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가 진정한 문명사회일 것이다.

불을 지른다. 대구의 그 광인은 아마 자신의 행위가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몰랐을지 모른다. 불을 지르는 일은 참으로 위험하다. 무심결에 던진 담배 꽁초 하나가 온 산을 불태우며 소중한 생태계를 파괴하면, 그 복원에 얼마의 세월이 걸린단 말인가.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쏠리니 그리고 일본의 도조가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을 지폈을 때 그 전쟁의 폭풍이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몰고 오리라고는 다 예상하지 못하였으리라.
이렇게 불을 지르는 사람의 의도와는 다른 길을 따라 불길은 때로 상상하지도 못한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여러 갈등과 불신이 자꾸 높아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누군가 불을 붙이면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감을 느낀다. 잘못 불이 붙으면 시장경제의 활력이 소멸되고, 그토록 노래부르던 평화가 송두리째 날라가 버릴지도 모른다.

대구의 지하철에서 주위의 시민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그 광인의 무모한 행위를 제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소리도 자지러진 통곡의 강을 바라보며 숙연한 마음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떠나보낸 사람들과 아픔을 나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교훈을 얻는다. 늦기 전에 행동해야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불길이 솟아 오른 다음에는 이미 늦다.


200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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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와 싸우다(2)

내우(內憂)는 외환(外患)을 부른다


   중국이 역사 침략의 야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고대국가 고구려를 자기 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우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의 전신(前身)인 고조선과 동예, 옥저 등 고대국가는 어찌되는 것인가. 또 그 후신(後身)인 발해는 어찌되는 것인가. 우리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다 말아 먹자는 속셈이 아닌가. 나는 일찍이 영토의 침략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역사의 침략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작년부터인가, 언론을 통해 중국의 이 역사침략 기도가 연일 폭로되고 있는데도 이 정권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대응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반미 감정을 확산시키고, 앞으로 우리나라의 제1의 파트너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던가. 나는 지금 그들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어디 중국뿐인가. 일본도 최근 국수주의적 우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더욱 강하게 치고 나온다. 한일 정상회담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기자가 무엄하게도 한국의 대통령에게 독도 영유권 문제를 질문한다. 일본기자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지칭하며 질문할 때, 우리 대통령이 대한민국 영토에 독도는 있으나 죽도는 없다고 딱 잘라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발 더 나아가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에 시비를 거는 일은 국제사회의 정의에도 반하며 한일 양국의 이익을 해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세종대왕시대 복속시킨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일본은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라고 반박했다면 또 얼마나 명쾌했을까. 사실 대마도는 이종무가 1419년 정벌하여 우리 영토에 복속시킨 후 우리나라가 그 영유권을 포기한 일이 없다.

   그런데 이 나라 대통령은 그 질문을 받고 엉겁결에 다케시마 운운하며 얼버무리고 말았으니 국민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현대에는 군사력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다. 또 굳이 전쟁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거나 국가이익을 추구하지 않아도 다른 수단으로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시장은 개방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상호의존관계는 깊어만 간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나라는 무역이나 경제협력 등 경제적 수단만 가지고도 다른 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중국이 저같이 무도한 역사침략을 감행하고, 일본이 뻔뻔스럽게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우리를 깔보며 총성 없는 전쟁을 시작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그들이 우월한 지위를 확보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격하면 승리가 보장되는 유리한 시점이라고 믿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왜 그런 판단을 했을까. 또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나라가 내우(內憂)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극심한 분열과 혼란에 빠져있음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또 동북아시아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켜줄 힘의 균형추는 뭐니 뭐니 해도 굳건한 한미동맹이다. 그 동맹은 힘을 잃고 와해(瓦解)를 향해 한걸음씩 가고 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미국과의 동맹이 약화된 그 힘의 공백을 중국이나 일본이 우호적으로 메워줄 것으로 이 정권이 판단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고래(古來)로 언제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의 자주나 독립, 또 결정적 이해를 뒷받침해 준 일이 있었던가.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끝없이 우리를 침략하지 않았던가.

   보자.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이 극심한 분열과 혼란은 누구의 책임인가. 또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우리나라를 고립시킨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정권이다. 이 정권은 그저 국정의 최고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 그 이상으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은 내우를 일으켰고, 그 내우는 외환(外患)을 불러 온 것이다. 총성은 없다지만 우리보다 몇 배나 규모가 큰 인구, 국토 그리고 경제력을 가진 중국과 일본이 우리의 역사와 영토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으니, 이보다 더 심각한 외환이 어디 있단 말인가. 거기에다 우리 편을 들어줄 동맹도 사라져가고 있으니, 이 도전을 우리 힘만으로 감당해야 할 판이다.  

   과연 우리에게 어떤 수단이 있을까. 우리가 그들 나라와의 관계를 험악하게 몰고 가면 결국 나라 사이의 경제관계가 타격을 받을 것이다. 서로 간에 경제보복이 시작되면 그들이 받을 타격에 비해 우리가 받을 타격은 파멸적인 수준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일본이 이 사실을 읽지 않고 이런 엄청난 도발을 감행했을 리 없으리라. 그들은 때를 기다렸고, 우리는 멍청하게도 틈을 내준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이 도전을 극복해야 하나. 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방도는 무엇인가. 나는 이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왜 중국은 저렇게 이치에도 닿지 않는 황당무계한 짓을 벌이는 것일까. 우선 이것을 알아야 한다. 중국은 1992년 우리나라와의 수교 이전부터 수교 후 급속히 성장할지도 모르는 옛 만주(지금의 동북3성)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민족의식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용의주도하게 대비해 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족자치주에 한족 출신 인구를 늘려 60%이던 조선족의 인구비율을 40% 이하로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착수한 것이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이다. 중국의 동북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을 체계적으로 다시 연구한다는 것이다. 2001년 기획되고, 2002. 2. 18 중앙정부의 승인을 얻어 본격 착수되었다. 물론 결론을 정해놓고 벌이는 공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은 옛 만주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식이 팽창하여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 두려움이 역사침략이라는 선제공격을 가져왔다고 나는 믿는다. 설마 중국이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역사적, 과학적으로 접근해 보자. 중국의 주류민족은 한족(漢族)이다. 한족 이외에 55개 소수민족이 있다고 하지만 그 수를 다 합쳐도 미미하다. 특히 티베트를 제외하면 잠재적으로도 민족문제를 일으킬만한 소수민족이 없는 실정이다. 모두 다 중국에 동화(同化)된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 민족이 배후에서 독립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경우도 몽골과 한국을 제외하면 없는 형편이다. 몽골은 현실적으로 가까운 장래에 다시 위협적 존재가 되기 어려운 나라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분단의 악조건 속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그 기상 또한 호방한 나라이다. 수교가 되고 왕래가 많아지면, 특히 한국이 통일되어 더 강대한 나라가 되면 만주지역 조선족들의 민족의식이 폭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그들은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의 주류민족인 한족은 북방 민족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중국의 고대로부터 북방 기마민족, 유목민족의 침략 때문에 그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만리장성을 쌓았겠는가. 또 그 환경 좋은 도읍을 다 버리고 척박한 북경을 수도로 정했겠는가. 모두 다 그 두려움 때문이다. 중국 역사 가운데 거란족이 세운 ‘요(遼)’, 여진족이 세운 ‘금(金)’ 나라를  빼고도 북방 소수 민족이 전 중국을 지배한 통일왕조만 하더라도 몽골족의 ‘원(元)’과 여진족의 ‘청(淸)’ 나라가 있다. 수백년 간 중국 대륙을 지배한 몽골족과 여진족은 당시 인구수로 볼 때 한족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소수 민족이었다. 이 억센 북방의 소수 민족에게만 한족은 긴 세월 동안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을 갖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 중국이 그 역사를 말살하려는 고구려는 당연히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이다. 그 고구려의 위력은 어떠하였던가. 고구려와의 충돌과정에서 통일 왕조 ‘수(隋)’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당(唐)’이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우리는 먼저 중국의 이 두려움을 없애주어야 한다. 요즘 일부 책임있는 사람들이 고대사의 연구와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방도인양 말한다. 물론 그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이 싸움이 역사 이론의 우열로 판가름 나겠는가. 중국이 이론의 우위로 싸움을 걸어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중국과의 수교를 전후하여 지금까지 많은 우리 국민들이 만주지역을 방문하여 이곳이 우리 땅이라는 메시지를 얼마나 남발했는지 되새겨 볼 일이다.

   시대는 변했다. 이제 총칼로 영토를 넓힐 필요가 없다. 그 나라의 경제력과 문화의 영향력을 통하여 국민들이 더 넓은 영역에서 더 많은 기회를 향유할 수 있으면 되는 시대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각에서 중국의 불필요한 두려움, 그리고 그로부터 증폭되는 역사침략의 확대를 막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 민간 차원에서, 미래의 한중관계가 어떤 경우에도 영토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되며, 또 한국은 그럴 의지도, 이유도 없다는 것을 설파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내우(內憂)를 해소하여 국민적 단합을 이루고, 동맹을 강화하여 힘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우리가 튼튼하면 상대가 우리를 깔보고 덤비지 못한다. 우리가 분열되고 편들어줄 곳이 없으면 언제 또 어떤 침략이 일어날지 모른다. 내우를 해소하고, 동맹을 강화하는 문제는 지난 글에서 다루었던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그 출발이다.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통일이다. 이제 통일을 더 이상 두려워해서도 안되며, 지체해서도 안된다. 도대체 독일이 통일을 이룬지 얼마가 지났는가. 15년이 지나도록 마지막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통탄할 일이다. 우리가 통일을 이루고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면, 중국도 일본도 이렇게 우리를 능멸하지는 못할 것이다. 분단 상황으로 소진되는 우리 민족의 에너지를 하나로 융합, 폭발적 힘을 분출시켜 우리의 자존을 지킬 수 있는 근원적 길은 통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일은 벌어졌다. 냉철하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다. 허둥대거나 좌절해서는 안되며, 특히 상대의 강한 곳에서 우리의 약점을 노출시키며 확전해서도 안된다. 싸움을 언제 끝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의 도발로 우리 국민이 정신적 상처를 받고 기(氣)가 꺾이는 것이 아니라, 더 용기 있게 우리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단합을 이루며, 역량을 모아 통일을 성취하는 계기를 만들면, 결국 우리는 이 싸움에서 진정한 승자가 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일본에 대하여는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단합과 통일을 가장 두려워하는 나라가 바로 그들이다. 통일을 이룰 때 그들의 도발 의지는 꺾이게 된다.

   보라, 우리에게 밀려드는 저 높은 파도를. 그러나 타고 넘으면 그 뿐이다. 사실 도둑질해간다고 없어질 역사인가. 우리 민족의 영혼속에 살아 숨쉬는 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대륙을 호령하던 기마민족인 한민족(韓民族)! 그 웅혼(雄渾)의 기상을 드높여 미래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면 될 일이다.

 

2004.   8.   10

이   인   제




 

Posted by 뉴스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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