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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6 이인제, 모험가적인 아폴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정반대의 원형을 대표한다. 합리적이며 냉철한 지성, 객관적 판단력과 직선적이고 명료한 사고를 대표하는 두뇌형 인간인 아폴론은 감정적으로 격렬하며 심리적으로 폭발적인 충동, 모순과 대립의 병존을 대표하는 감정형 인간인 디오니소스에게 끌리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신화에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은 델피 신전을 공유한다. 두 남신은 델피에서 다같이 숭배를 받았는데 겨울 석달 간은 디오니소스가, 한해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아폴론이 숭배되었다. 전통적으로 이 두 남신은 반대 성격의 원형을 대표한다. 그러나 만일 한 인격 속에 이 두 남신의 원형이 함께 있다면 그것을 서로를 보완해 주는 기능을 하며, 특히 서로의 장점들을 상호 작용시킨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격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다.

이인제 국민회의 당무위원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원형이 복합적으로 깃든 인물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쑥스럼움을 잘 타는 내성적이며 여성스런 면을 가지고 있지만, 외면적으로는 뛰어난 두뇌와 명석하고 합리적인 판단력으로 상황을 개척해 나가고 사회속에서 확고한 자기 위치를 굳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가 가진 감정적인 폭발력과 모험적인 파괴력은 종종 중대한 순간에 그를 ‘도박’적인 행동에 나서도록 충동질하면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길 좋아하는 아폴론적 기질을 돌파해낸다.

아폴론은 확실한 가능성에만 자신을 내걸지만, 디오니소스는 확률 게임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신념에 의존한다. 즉 승률이 10%밖에 되지 않는 게임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을 파괴해 버릴지라도, 이것이 디오니소스다.

이 위원은 실제로 여러 번 그런 게임을 치렀다. 지난 대선 때만해도 그랬다. 1997년 3월 하순 그가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만 하더라도 당내에서나 언론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여론조사를 통해 나타난 지지도에서도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일부에선 ‘무모한 도전’이라고까지 받아들였었다. 물론 그 이전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깜짝 놀랄 젊은 후보’ 발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지만, 정치적으로 무일푼 상태에서의 그의 도전은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TV토론을 거치면서 그의 대중적 지지도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고, 이인제 바람을 일으키며 정가를 강타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태풍이었다. 대통령 후보 경산에서 2위를 차지하여 이회창 후보에게 패하긴 했지만, 사실상 그는 정치적으로는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의 정치적 모험은 일단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파격은 신한국당 경선에서의 패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경선 승복’ 선언을 뒤집고 결국 신한국당을 탈당한 후 국민신당을 결성, 독자적인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또 한번의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는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40대 젊은 기수로서 과거 김대중, 김영삼 양 김씨가 보여주었던 것과 유사한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사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은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1987년 국회의원 선거 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안양에 출사표를 던져 당선된 것이라든지, 지방자치 선거 때에도 당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굳이 당내 경선을 고집한 것이라든지 하는 일이다. 그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모험심 강한 아폴론이다.

이인제 당무위원에게 흔히 부여되는 ‘과감한 돌파력과 추진력’, ‘솔직 담백함’이란 장점은 바로 그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원형의 발현이며, 또 다른 한편의 ‘똑똑하다’, ‘차갑고 냉랭한 이미지다’라는 측면은 그의 아폴론적인 일면이 바깥으로 투사된 것이다. 즉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모순된 기질이 그에게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고, 그것이 대중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과단성과 추진력은 결코 그가 다른 정치인들보다 젊기 때문에 ‘패기’가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실 디오니소스는 ‘영원한 젊은이 상’을 대표한다. 디오니소스의 패기는 때로는 좌충우돌하기도 하지만 그 일면이야말로 나이와는 관계없이 늘 ‘젊은이’ 이미지를 유지하는 요인이다. 50세가 넘은 그에게서 청년기질이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졌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의 면모는 물론 아폴론적인 측면이다. 그가 자신의 아폴론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발휘해 온 것은 어쩌면 청소년기의 혹독했던 가정환경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다른 무기가 없었고, 그의 타고난 두뇌를 최대로 잘 활용하여 마침내 사회적인 성공을 거머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만일에 그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면, 그는 어쩌면 똑똑한 불량학생으로 자라나거나 혹은 법관의 길이 아닌 문학이나 예술방면으로 진로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 1960년대에 전 사회를 들끓게 했던 히피운동이 결국 디오니소스적 운동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분히 디오니소스적 기질을 가진 그가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는 모범생으로 자라나리라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아폴론적인 힘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것을 영민한 머리로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면은 김중권 청와대비서실장과 비슷한 경우이다.

그는 1948년 충남 논산에서 4남 2녀 중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가난한 농군이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월사금이 없어서 9살이 되도록 초등학교에도 입학을 못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논 몇 마지기를 어렵게 부쳐 생계를 이어가는 소농집안에서 4남 2녀를 모두 고등학교까지 보낼 수가 없어서 장남과 차남은 중학교만 마치고 상경해서 일찍부터 가족을 위한 생업에 종사해야 했다. 어머니는 돼지를 기르고 가마니를 치며 생계를 거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이 위원은 내성적이고 과묵한 성격의 소년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고, 초등학교 때는 혼자서 선생님을 좋아한 나머지 선생님이 되길 꿈꾸었던 감상적인 소년이었다. 집안 형편상 중학교 진학마저 어렵게 됐을 때 그는 “시험을 잘 봐서 5등 안에만 들면 돈 없이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며 부모를 설득, 논산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기도 했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부인 김은숙 씨를 만났는데, 김씨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들은 논산여중의 학생회장과 논산중학교 학생회장으로 논산 지역 중학교 학생회장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이 위원에게는 그녀가 첫사랑이었고, 그 첫사랑이 자신의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무려 10여년의 연애 끝에 결혼한 케이스다.

부인 김은숙 씨와의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위원의 여성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일면이 아주 잘 파악된다. 지난 대선 때에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부인 김은숙 씨는 일종의 ‘여장부’스타일이다. 전형적인 아테나형 여성이다. 좋은 의미로는 ‘힐러리 스타일’이기도 하고, 나쁜 의미로는 ‘치맛바람형’으로 보여지기도 하는 스타일이다. 아폴론적 이미지로 각인된 이 위원에게 그런 강한 이미지의 부인은 안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시각이 대체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그의 디오니소스적인 성향을 이해하면 다 풀린다.

디오니소스는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남신이다. 디오니소스는 오르기아라고 불리는 의식에서 여성들의 광적인 숭배를 받았던 신이다. 그리스의 여성들은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세계에 빨려 들어가 포도주와 광란의 음악 속에서 황홀경의 춤을 추었다. 디오니소스는 자신이 모성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며 여성들로 이루어진 단체를 훨씬 더 좋아하는 남성의 원형이다.

이런 디오니소스적 기질이 다분한 이 위원에게 아테나적 기질이 강한 그의 부인은 좋은 반려자가 된다. 그는 사회 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위치 때문에 아폴론적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그의 성인 가정으로 돌아오면 디오니소스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집에서는 직접 상을 닦고 과일을 깎는 등 부드럽고 온화한 가정적인 남자로 변신한다. 아내보다 한 달 먼저 미국에 도착한 그는 지도를 들고 주변 지역을 사전답사한 후 뒤늦게 온 아내에게 관광 가이드를 했다고 한다. 또 같은 종류의 음식을 두 번 먹지 않을 정도로 별미 식당을 찾아다니는 왕성한 탐험가적 여행객의 모습을 보였다. 지난 6개월의 미국 생활동안 그의 집을 방문한 손님들은 늘 그가 깎아주는 과일을 먹었다.

그가 법관이 되도록 이끈 것도 부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는 내성적이며 문학적 취미를 가진 소년으로 책읽기를 좋아했는데, 자신의 여성적인 내면을 극복하기 위해 강한 남성의 상징인 군인이 되기를 꿈꾸던 소년이었다. 이는 여성적인 내면을 가진 니체가 자신의 소심함과 내성적인 면을 보강하기 위해 군인을 동경하기도 했고, 강한 남성적인 철학을 구사한 것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 때가지만 하더라도 역사책을 읽으며 나폴레옹이나 이순신, 을지문덕 같은 전기에서 감명을 받으며 군인의 꿈을 키웠지만, 고등학교 때 한창 열애 중이던 김은숙 씨가 편지를 보내 장래 법관이 되는 게 좋겠다는 충고를 했던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의 전기를 읽으며 서서히 나폴레옹의 꿈 대신 링컨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마침내 서울대 법대에 진학함으로써 그 꿈을 구체화하기에 이르렀다. 디오니소스적 기질이 다분한 그에게는 여성 아폴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테나적 기질의 부인이 그의 충동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가 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디오니소스적 기질을 간직한 채 러시아 문학에 심취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데 더 열중하는 소년이었다. 영화는 거의 빼놓지 않고 보러 다녔으며, 펄벅의 『대지』를 읽으며 그 감동으로 밤잠을 설치던 문학 소년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는 2학년 말에 다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냉정을 되찾고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양복기술을 배우며 단칸방에서 살고 있던 큰형 덕제 씨에게 얹혀 살며 학교를 다니던 구차한 환경에서 언제까지나 낭만적인 꿈만 꾸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의 아폴론적인 기질이 그에게 다시 목표를 되찾게 해주었고, 그의 목표는 서울대 법대와 법관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그 목표를 달성했다.

아폴론의 장점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쉼없이 정진하는 데 있다.

탁월한 분석적 두뇌를 가진 아폴론에게는 그 목표가 현실적이기만 하다면,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다. 일에 관한 한 아폴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완벽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대학시절에도 전형적인 아폴론적 인물처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분석하고 관찰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디오니소스적 기질이 그를 학생운동으로 끌어들였고 3선개헌 반대투쟁, 전태일 분신사건, 교련 반대 시위 등에 참여하며 학생운동가로 활동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디오니소스적인 소년은 아폴론적 합리성을 단련하게 되었고, 남성들과의 조직적인 협력에도 적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아폴론이 아니었던 그는 결코 법관으로서 평생을 지낼 수는 없었다. 이 대목이 박철언 자민련 부총재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박 부총재는 정치인이 되기 전까진 전형적인 아폴론으로서 아폴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 중 하나인 검사로서 맹활약을 했었다. 1980년대 초의 정치적 격변과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정치권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검찰 수뇌부로까지 승진할 그런 기질의 남자였다. 그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달리는 데 익숙하지 낯선 길에 도전할 사람은 아니었다.

반면에 디오니소스적 기질도 강한 이 위원은 1981년 대전 지방법원 판사로 법조계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판사 생활 2년 만에 과감히 사표를 던져버린다. 들끓는 디오니소스적 기질을 가진 인물에게 오로지 객관적인 법률적 판단만을 중시하고 체제를 수호하는 입장인 판사라는 직업은 결코 매력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노동인권 변호사로, 그리고 거기에서도 다시 한 번 변신을 거듭하여 정치계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의 속에 있는 아폴론은 ‘두뇌’가 요구되고,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자신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그는 1988년 13대 국회 때 국회 광주항쟁 청문회 때부터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다. 아폴론의 객관적이며 논리적인 분석력, 꼼꼼한 일처리 솜씨는 당연히 TV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초선의원이면서도 청문회 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1993년 김영삼 정부 때는 최연소 장관으로서 노동부장관에 입각되었다.

그와의 첫 인터뷰는 노동부장관 시절에 이뤄졌다. 난처한 현안과 관련된 질문에 표정 하나 변함없이 똑떨어지게 논리정연한 답변을 하는 그를 보고는 단박에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대선 기간 중 많이 바뀌었다. 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이 합당을 하고, 그가 미국행에 오르기 직전에 한 행사장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부드러운 농담도 건넬 만큼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적 모습을 두루 본 셈이다.

아폴론적 기질을 가진 그는 누가 보아도 똑똑하기 그지없다.

그가 지난 대선 때에도 그토록 급작스럽게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TV토론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도 그런 전례가 있다. 바로 1960년대에 케네디와 닉슨이 경우다. 젊은 케네디는 노회한 정치인인 닉슨을 TV토론에서 녹다운시켰다. 이 위원도 그런 스타일이다. 국민들은 TV토론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논리정연함, 그리고 상대적으로 젊은 그가 보인 패기와 박력에 엄청난 기대를 걸게 되었던 것이다. 대선TV토론은 그에겐 1988년 국회 청문회 때 쌓아두었던 경험을 재활용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폴론 인물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아폴론적 단점이 그에게도 치명적으로 나타난다. 쉽게 말하면 아폴론은 너무 똑똑하고 잘난 것이 탈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도 문제다. 그는 모든 분야에 대해 정확하고 순발력 있게 파악해 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거기에 호기심까지 많아 박학다식하다. 그래서 어느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막히지 않는다. 말 한두 마디면 이야기의 핵심을 간파해낸다. 탁월한 지적 감각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미국 체류 중 이야기다.

우리나라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한 학생이 “미국에서는 가진 자들이 사회에 부를 헌납하는데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문화인데 우리나라 부자들에게도 그런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유심히 듣던 그는 다른 자리에 참석해서 이를 ‘아너리즘(Honorism)'이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후 자신의 소신으로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듣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논리와 즉각적인 센스를 겸비한 인물이다.

자신이 그렇다 보니 남의 얘기를 귀담아 듣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에만 의존하려 하며, 타인들을 잘 챙기지 못하는 면이 있다. 독단적이고 은근히 권위적인 아폴론적 일면이 그에게 고스란히 나타난다. 결국 자신의 주위에 모인 참모들을 챙기지 못한다. 참모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고 잘 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정치적 대부였고 그에게 정치를 가르쳐 줬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똑똑하지는 않지만 정감 어린 태도와 사람을 사로잡는 특유의 인간미로 똑똑한 사람들을 참모로 거느렸다. 주위 사람들이 모든 걸 걸고 도와주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타고난 친화력을 가진 인물이 김 전 대통령이었고, 그것이 그의 주요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러나 이 위원은 참모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분석가이자 기획자이지만, 모든 일을 혼자서 판단하고 처리하려는 강한 욕망을 내보임으로써 전체를 이끌어 가는 그룹 내의 리더로서는 한계가 있다. 잘난 체 하며, 자신의 두뇌를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그의 일면 때문에 지난 대선 때 그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이 곁을 떠나 지금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다. 자칫 잘못하면 ‘독불장군’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잔정을 베풀어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해 버려서 타인들에게 쉽사리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는 대중정치인 스타일이 아니라 어쩌면 매스컴 정치인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인간관계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면이 아폴론이면서도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자인 디오니소스적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단면인 것이다.

이런 아폴론적 고집과 디오니소스적인 개인주의가 정치 지도자로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이 아폴론적인 뛰어난 두뇌와 디오니소스적인 과단성이 그를 성장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다면, 중진급 정치인에서 그야말로 대통령 후보급 정치인으로 성장하려는 지금 단계에서는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조직과 자금력, 세몰이’가 중심인 한국 정치의 현실탓이기도 하다.

만일 그가 미국에서 정치를 한다면, 그이 약점인 조직이나 세몰이 없이도 곧장 매스컴을 통한 여론적 지지와 정책적 비전으로 승부를 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대선 때에도 이미 그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나고 말았다. 그에게 부족한 조직과 자금, 세를 결집하기 위해서 ‘국민신당’이라는 당을 급조했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힘겹게 만들었던 국민신당이라는 당조차도 키워내지 못하고 공중분해시키고 말았으니 말이다.

한국에서는 정치 9단이라는 정치적 입신(入神)의 단계에 오르려면 당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이때의 당이란 물론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원내 의석 20석 이상의 국회의원들을 충성스런 계보로 거느릴 수 있고, 자신의 정치력으로 당선시킬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 국민회의에 들어가 있는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다.

비록 지난 대선 때 엄청난 국민적 지지력을 과시했지만, 국민의 여론이란 대단히 변덕스러운 것이다. 박찬종 씨의 몰락이 이를 쉽게 반증한다. 그런 국민적 인기란 마치 대중스타의 순간적 인기와 비슷한 것이고, 또 국민들은 쉽게 잊어버린다. 특히 지난 대선 때에는 ‘박정희 신드롬’이 박정희를 닮은 그의 외모에 큰 역할을 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즉 IMF라는 위기 상황이 박정희를 닮은 그에게 박정희와 같은 도전적이고 강력한 지도력을 기대하는 심리를 부추겼던 것이다. 이 점은 ‘5백만표’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에겐 탁월한 두뇌와 디오니소스적 과단성이라는 정치적 강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 정치계에서 3김씨와 같은 거물급으로 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똑똑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거기에 플러스 α가 필요한 것이 한국 정치계다. 지금 그에게는 든든한 뿌리가 없다. 물론 기존 정당에서 그를 차기 후보로 밀어주기만 한다면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차세대 주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정당 내에는 이미 자신의 계보를 거느린 중진들이 서로 각축전을 벌이며 차기를 노리고 있는 상태다. 그는 지금 국민회의에 몸을 담고 있지만 당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여전히 애매모호한 상태이고 당내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만일 내각제가 된다면 당을 뛰쳐나오겠다고 공언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는 또 한번의 ‘정치적 모험’을 하는 셈이다. 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이라는 거대한 두 당 사이에서 홀로 어떻게 생존하며, 또 다음 대선에 무엇을 무기로 승부를 걸 것인가?

한마디로 그에게 부족한 것은 헤르메스적 원형이다.

헤르메스는 전령의 신이다. 뛰어난 친화력으로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대화와 타협을 이끌어 내는 신이다. 헤르메스는 자신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타인들의 목소리를 담아서 융화해 내는 타입이다. 그런 친화력이야말로 정치에서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미덕이다. 정치란 결국 조직적인 투쟁의 장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헤르메스적 기질이 뛰어난 이종찬, 이수성, 김상현, 김윤환 같은 인물들이 늘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며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위원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이런 자신의 단점을 깊이 숙고하여 헤르메스적 원형을 개발해 나간다면, 그의 정치적 장래는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현재 경향신문사 뉴스메이커부 임희경 기획위원이 지난 98년 출간한 『그들 속의 神 (우리시대 정치인 20명 캐릭터 분석)』에 게재한 글이다.


Posted by 뉴스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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