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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9 [IJ 에세이] 돼지 고추장 숫불구이
봄을 재촉하는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대지 깊은 곳에서 성장을 준비해 온 생명들에게 은총처럼 스며들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라. 온 세상을 푸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두 주일 동안 지역구 주민들을 찾아뵙고 돌아와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 창문을 연다. 2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이다. 이미 겨울의 냉기는 사라지고 봄의 온기가 온 몸에 느껴진다. 하지만 멀리 남한산의 정상에는 하얀 눈이 보인다. 비에 젖은 대지와 눈 덮인 산의 정상이 참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내와 나는 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나는 자동차 운전을 좋아하여 주말이면 가급적 직접 핸들을 잡는다. 옆에 앉은 아내와 함께 두 딸이 어렸을 때 뒷좌석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나서면 언제나 잠을 자던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에 잠긴다. 우리는 그 때 그 길을 따라 가고 있다. 성남에서 남한산성을 넘어 광주로 나간다. 광주시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좌로 방향을 틀면 팔당호와 천진암으로 가는 길이다. 특별히 목적지를 정한 것도 없다. 우리는 한국 천주교가 100년의 계획으로 세우고 있는 대성당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문득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기지사로 일하면서 이곳을 두 차례 방문하였는데, 그 때 우리나라도 이제 100년 단위의 사업을 추진할 정도로 성숙하고 큰 나라가 되었구나 하면서 자부심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비가 내린 탓인지 이 날에는 참배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100년의 역사라, 아직도 80년 이상이 남아 있다. 5년여만에 다시 찾아 왔지만 그리 큰 진전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 1m인 화강석 24만 개를 사용한다고 하니 과연 얼마나 웅장한 건축물이 될 것인가. 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필적할 수 있을까. 나는 어린애 같은 호기심에 빠진다. 아, 80년 후면 우리 부부는 물론 내 두 딸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오는데 군데군데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 점심때가 되어서인지 더욱 또렷이 보인다. 그런데 그 간판들 중에 “돼지 고추장 숫불구이”라는 간판이 많이 있다.             나는 유난히 돼지고기를 고추장에 발라 구운 음식을 좋아한다. 아내도 가끔 이 요리를 하여준다. 나의 형수님들은 옛날 학창시절 내가 형님 댁에 간다고 하면 아예 이 음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셨다.                                    

시내에서는 이런 음식을 파는 집을 구경하기 어려웠는데 이곳에서는 이 요리가 인기 있는 메뉴임이 분명한 것 같다. 배도 고프고 호기심도 동하여 전통이 있어 보이는 한 집을 찾아 들었다. 1인분에 11,000원 하는 돼지고기 2인분을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한다.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여성이다. 내가 지사로 일할 때부터 너무 잘 알고 있다며 반가와 한다.

내가 말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손님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적군요.”
“예, 오늘 날씨가 흐려서 야외로 많이 나오지 않으셨나 봐요. 요즘 경기가 너무 나빠요.”
주인 아주머니는 아주 걱정 어린 표정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매상이 과거 이맘때쯤보다 얼마나 줄었나요?” “매상은 한 3분의 1정도 줄었는데 그것도 문제지만 더 골치 아픈 문제가 있답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근심과 걱정으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아니, 매상이 뚝 떨어지는 일보다 더 걱정되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긴장하며 주인의 설명을 들었다. 요즘엔 도대체 일할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한 달에 100만원을 주었는데 사람이 없어 120만원으로 올렸어도 일 할 아주머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 불법체류자를 모두 내보내면 이 음식점도 문을 닫아야 할 실정이란다.

“아주머니들은 다 어디로 가셨나요?” 나는 다시 물었다. “잘 모르지만 무슨 노래방에 가서 일을 하면 힘도 들지 않고 수입이 많아서 이렇게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답니다.” 주인의 대답을 들으며 그것이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지 내 마음도 무거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얼마 전 논산에서 만난 보험설계사 아주머니 한 분이 “이제 우리나라는 망했습니다” 라고 거침없이 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분의 설명은 농촌의 노인 어른들까지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들고 나와 로또 복권을 사기 위해 끝없이 줄을 서 있는 나라가 어떻게 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땀흘려 일하며 보람을 느끼고, 그렇게 하여 번 소중한 돈으로 알뜰하게 살아가는 정신이 뿌리 채 뽑혀 나가고 있다. 아, 어찌하다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왔는가. 국가를 경영해 보겠다고 나선 정치인으로서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식당주인 아주머니와 보험설계사 아주머니가 이렇게 절규하는데 막상 나라를 이끄는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참 숯에서 타오르는 파란 불꽃이 향기롭다. 거기에 익혀 먹는 고추장을 바른 빨간 돼지고기가 더없이 맛있다. 음식이 참으로 정갈하고 정성이 담겨 있다.

아내와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인 아주머니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도 나누었다. 아내는 옛날 숯불로 밥을 짓던 생각을 했는지 앞으로는 집에서도 가끔씩 숯을 쓰고 싶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아주머니가 떠나려는 우리에게 숯을 한 상자 들고 달려온다.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숯 값을 아주머니의 손에 쥐어드리고 그 집을 떠날 즈음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늦은 점심을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2003. 2. 25



 

Posted by 뉴스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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