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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22 양 날개의 곡예(2)

폭풍의 바다와 싸우다(13)

양 날개의 곡예(2)

   국가 경영의 양 날개는 안보와 경제이다. 일찍이 공자(孔子)가 말했다. 나라를 지킬 군대(兵)와 백성을 먹일 식량(糧), 그리고 임금과 신하와 백성 사이의 믿음(信)이 국가 경영의 세 가지 요체이다. 공자는 이 가운데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불신을 보면 공자가 무슨 말씀을 하실까. 정치하는 한 사람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난 번 나는 안보 문제를 두고 이 정권이 벌이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곡예를 비판한 바 있다. 오늘은 경제 문제를 두고 벌이는 또 하나의 곡예를 살펴보자.

   국민의 연기금을 증시에 쏟아 붓겠다는 이 정권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연기금을 증시에 투입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 대하여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의를 제기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연기금의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당연히 의견을 말할 입장인데도 그의 의견 표출은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증폭시키며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나는 그의 말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 정직한 표현이다. 다만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장래를 위해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관리하는 책임 장관으로서 국민을 위해 올바른 소리를 했다고 판단했다. 요즘처럼 광기가 지배하는 권력의 위력 앞에서 그래도 용기 있는 발언을 하는 장관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의 용기는 몇 시간을 지탱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런 말을 하지나 말지, 기대를 걸었던 많은 사람들을 더욱 허탈하게 만들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즉 연기금의 증시투입을 둘러싼 논쟁이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고 국민의 편에 서서 이 난폭한 정책을 막아줄 야당마저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이 정책은 궤도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아, 나에게 이것을 막아낼 힘이 없구나! 이 정책이 결국 어떤 재앙을 몰고 올 것인가?

(사진 : 대공황시대의 실업자들 행렬)

   나는 그것을 오늘 분명히 말해두어야 한다. 현재 연기금의 주식투자는 법에 의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아주 예외적으로 극히 일부가 증시에 투자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노 정권은 기금관리기본법을 고쳐 대부분 연기금의 증시투자를 전면적으로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불쑥 이 정책을 들고 나온 것은 소위 한국판 뉴딜정책을 거론하면서이다. 1930년대 미국에 불어 닥친 대공황과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불황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는 것인지 아무 설명도 없으면서 다짜고짜 뉴딜정책을 쓰겠다고 한다.

   우리 모두 아는 것처럼 뉴딜정책은 국민들의 호주머니를 채워 유효수요를 창출함으로써 미증유의 불황으로부터 탈출한 정책이지 기업의 자금조달을 용이하게 하여 성공한 정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당시 대규모의 토목사업 등 인프라 건설에 공공재원을 쏟아 부었지 증시에 쏟아 붓지 않았다. 연기금을 증시에 투입한다면 일시 증시가 활황을 띄고 기업들이 자기자본을 조달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 정권의 사람들은 말로는 뉴딜과 불황탈출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그 막대한 연기금을 기업들의 자본조달을 도와주는 정책에 동원하겠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를 휩쓰는 이 참혹한 불황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 기업들이 투자할 곳은 많은데 값싸게 자금을 구하지 못해 애로를 겪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연기금의 증시 투입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정책이다. 물론 나는 이 경우에도 찬성하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본질이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첫째는 서민들의 호주머니가 비어 있다. 500만 명 가까이가 신용파탄상태이다. 1년에 만 명 이상이 자살을 한다고 한다. 자살률 세계 최고라고 하니 어느 사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가 된 것인가 착각을 느낀다. 특히 가장 왕성하게 소비할 젊은 세대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실업상태에 있다. 이러니 소비가 줄고 장사가 안 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공급을 담당하는 기업은 어떠한가. 정부의 정책노선과 일관성에 절대적인 불신을 보낸다. 도대체 이 정권을 믿고 일년 계획이 아니라 한달 계획도 세울 수 없다고 야단이다. 신뢰가 사라진 시장은 사막처럼 활력을 잃고 삭막해진다. 소비수요가 마르니 더 투자할 곳이 없다. 반대로 자꾸 사람들을 내보내 실업자를 늘린다. 아직도 거미줄 같은 정부의 규제와 투쟁적인 노동조합의 파업 때문에 의욕조차 사라진다. 다른 나라에서는 죽기 살기로 투자유치를 위해 양탄자를 깔아놓고 유혹한다. 그래서 기업의 해외 탈출이 봇물을 이룬다. 기업이 값싼 자기자본을 조달할 수 없어 투자가 안 되고, 투자가 부진하여 고용과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우리 사회가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인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들은 국민들을 호도하며 국민들의 피와 땀이 얼룩진 연기금을 증시에 쓸어 넣겠다고 야단이다. 오, 어찌 이 광기를 막을 수 있을까!

   이 정권은 지금이라도 불황의 본질을 찾아 탈출의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엄혹한 겨울을 만들어 놓고 추위에 떠는 초목에게 모닥불을 피우며 성장을 재촉하는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한다.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국민들의 미래를 위한 밑천을 긁어다 부으면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는가. 결국 연기금만 다 소진되고 더 큰 절망만이 기다릴 것이다. 겨울은 시장을 훼손하는 권력의 개입, 즉 좌파노선으로부터 찾아왔다. 용기 있게 노선을 바꾸어야 한다. 저 브라질의 룰라로부터 배우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온갖 규제를 혁파하고 노동시장을 개혁하여 기업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도전과 창조의 기업가 정신이 살아나지 않고 무슨 수로 시장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겠는가.

   이 정권은 이렇게 뉴딜정책을 외치고 경기부양을 위해 연기금의 증시투입을 주장하더니, 이론이 궁했는지 연기금의 투자수익률 증대와 우리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들고 나온다. 즉, 저금리 때문에 연기금의 가치증식을 위해서는 금융상품에 의존하던 종래 방식에서 증시투자라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들의 주식을 외국 자본이 절반 이상 매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든 적대적 M&A가 가능하므로, 이 경우에 대비하여 연기금이 기관투자가로서 국내기업의 경영권 방어와 지배구조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은 참으로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우선 투자수익률 제고이다. 연기금은 사회안전망의 물적 수단이다. 따라서 그 기금의 운영은 안전과 안정이 최우선 고려사항이다. 투자를 위한 기금이 아니라는 말이다. 더구나 우리의 연기금은 모두 법에 의해 강제로 징수하는 세금과 다를 것이 없는 공공 성격의 돈이다. 다른 나라의 임의적인 기금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 목적 또한 국민들의 미래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한 담보이다. 위험이 따르는 곳에는 절대로 투자할 수 없는 것이다. 위험이 현실화하는 날에는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처음 연기금을 설계할 때 높은 금리를 전제로 하였는데 지금은 저금리가 되었으니 증시투자 외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고 하지만, 증권시장이야말로 가장 불안정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특히 우리나라 증시는 그 불안정성과 위험성의 강도가 심하다. 증시에 투자된 돈 가운데 외국 자본이 44%가 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학자들은 40%가 넘으면 정부의 정책이 자본시장에 먹혀들 수 없다고 한다. 이미 우리 증시의 주도권은 외국자본의 손에 넘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앞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연기금을 쏟아 붓는 것은 방법이 될 수 없다.

   또 우리나라에는 선진국처럼 고도의 역량을 갖춘 투자전문그룹도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가 독립된 기구에서 운용한다고 말은 그럴 듯 하게 하지만, 결국 관변 단체 비슷한 곳에서 방만하게 운영하다가 큰 화근을 키울 것이 분명하다. 영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과거 3년 간 주식시장 침체로 민간 연금자산의 1/3을 잃고 연기금 보장기구의 설립을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연기금은 모두 국가가 관리하는 공적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이를 증시에 투자하는 정책은 현 단계에서 전혀 고려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하여 연기금이 동원될 수 있다는 발상 또한 놀라울 뿐이다.

   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표적 기업들 즉, 포스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KT, 국민은행 같은 기업들이 외국자본의 적대적 M&A에 의해 경영권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한다. 아직은 외국자본들이 주식의 차익을 노리는 이른바 portfolio 이지만 언제 경영권을 목표로 움직일지 장담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공적 연기금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동원되는 일은 소의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된다.  

 
(사진 : STX 적대적 인수합병설)

   먼저 우리의 연기금은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돈이다. 이 돈이 기업의 경영과 지배구조에 영향을 준다면 이미 그 자체로서 시장경제의 원칙이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관치경제의 막이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그 부정적 파장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서는 시장경제의 원칙 안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아무 쓸모도 없는 불필요한 규제이다.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이런 규제를 풀어 우리 기업들이 스스로 길을 찾도록 해주는 일이 시급하다. 또한 자본 시장을 건강하게 육성하여 우리 국민들이 더 많은 돈을 증시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한다면 외국자본의 비중은 감소하게 될 것이다.

   지난 김대중 정권 때 잘못된 신용카드 정책으로 오늘 우리 사회에 어떤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가. 지금 생각하면 말도 되지 않는 터무니없는 신용카드 남발과 신용한도 책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는가. 그 때에도 정권의 목표에 맞추어 경제 관료들이 궤변을 늘어놓으며 그 정책을 태연히 추진하였다. 그리고 지금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오늘 120조에 이르는 연기금을 불안정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증시에 투자하겠다고 야단이다. 경제 관료들이 앞장서서 자신만만이다. 저들이 틀림없이 큰일을 저지르려 한다. 하지만 후일 아무도 책임지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일이 터지고 나면 그들이 책임을 진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저들이 키우는 재앙을 보고 있으려니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의 시인 김춘수 선생이 운명하셨다. 시인은 꿈과 사랑을 노래한다. 시인은 실존과 희망을 추구한다.

   오, 오늘 우리는 절망의 어둠 속을 걷고 있으나 내일은 희망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저들이 내일을 위한 최소한의 담보마저 위험한 강에 던져버리려 한다!

   김춘수 시인의 명복을 빌며, 우리의 희망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


2004. 11. 30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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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뉴스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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