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바다와 싸우다(10)

폭란(暴亂)의 시대

    지난 10월 21일은 나와 나라에 큰 충격이 발생한 날이다. 이날 오전 10시 나에 대한 1심 판결 선고를 들으면서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였다. 참으로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판결이었다. 법정을 나서는데 어느 기자가 물어 나도 모르게 대답하였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난폭한 판결이오!”

   나는 정치를 시작한 이래 많은 모략과 중상을 당하였다. 정적, 언론, 그리고 일부 정치검찰로부터 거짓과 편견으로 얼룩진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리건대 나는 눈 섶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러한 공격에 당당히 맞서 싸웠다. 그런데 저들은 비열하게 거짓을 만들어 나를 법정에 세웠다.

   모든 권력이 통치자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봉건사회가 해체되면서 사법권은 행정권, 입법권과 함께 3권의 하나로서 다른 권력으로부터 분리, 독립되었다. 다시 말해 정치적 패배자, 사회 경제적 약자의 진실과 정의를 지켜주기 위한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독립된 권력으로 설계된 것이 곧 사법권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사법부는 권력의 편을 들어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 국민이 사법부에 대하여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판사 출신으로 사법부에 대한 존경과 믿음을 저버린 일이 없었다.

   나는 깊은 충격에 빠져 지난 일주일 동안 말을 잊었다. 정치탄압으로 고통 받는 내가 진실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붕괴될 때, 나는 마치 절벽에서 떨어지는 절망감을 느꼈다. 내 마음의 상처가 언제 치유될 수 있을지 솔직히 알 수가 없다.

   BC 44. 3. 15 로마의 종신집정관이던 시저(Caesar, Gaius Julius)가 원로원 공화정 옹호파들의 칼을 맞고 숨진다. 시저는 평소 적대세력들이 언제든지 자기를 공격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적들의 칼날이 날아들 때 그가 절망감을 느꼈을까. 아니다. 그가 믿었던 그의 양아들 부루투스마저 그를 찌를 때 그는 비로소 절망감에 빠져 외친다. “부루투스, 너 마저도!”

   소수자, 약자의 진실을 지켜주어야 할 사법부의 실상을 확인하는 나의 심정은 괴롭다. 부루투스의 눈을 바라보는 시저의 심정이 이랬을까. 하지만 나는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 절망감이 어찌 나만의 문제일 것인가. 따지고 보면 이러한 현실을 모른 채 안일하게 살아 온 나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하루 빨리 일어서야 한다.

   이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그렇다. 이 사건의 진실은 하늘이 알고 있다.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결국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고 정의가 승리할 것이다.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나의 길을 가야 한다. 점 점 어두움이 깔리고 절망이 깊어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정의로운 힘으로 절망을 몰아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소명임을 믿는다.

   10월 21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가 수도이전사업은 헌법개정절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혀졌다. 노 정권이 국민의 공감대를 확보하지 않은 채 정략적으로 밀어붙이던 수도이전사업이 일대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헌재의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에 반발해 시민단체인 자자치연대와 노사모가 항의 집회를 하는 모습)

   헌법재판소의 헌법해석은 뒤집을 수 없다. 물론 학자나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의견을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지고, 또는 다중의 힘으로 헌법재판소를 공격하면 헌정질서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상을 보라. 노 정권의 실세들이 순순히 승복하지 않는다. 노 정권의 홍위병들이 다중의 위력으로 헌재 재판관들을 겁주려 한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 대한민국의 헌법이 그들의 눈에는 휴지 조각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대통령은 헌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취임한다. 헌법을 무시하고 이 나라와 사회를 자기들 마음대로 변혁시키고자 한다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혁명가로 나서면 될 일이다. 우리 사회가 그들이 꿈꾸는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그들을 지지한다면,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할 일도 없을 것이다.

   헌법에 충성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오직 헌법의 정신을 해석하는 재판관들을 공공연히 공격하는 일은 결단코 용납될 수 없다. 이런 때를 위하여 준비해 둔 헌법상 국민의 권력이 저항권이다. 국민이 헌법에 의해 세운 정권이 헌법을 배반할 때, 국민은 이 헌법상 저항권을 발동하여 그 정권을 허물게 된다.

   노 정권은 지금이라도 겸허한 자세로 헌법에 충성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살고 나라도 사는 길이다. 헌재의 결정에 복종하는 것은 헌재 재판관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일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헌재의 결정은 무조건 수도이전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려면 헌법개정절차를 밟아서 하라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의 길은 수도이전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내는 일이요, 다른 길은 수도이전사업을 포기하고 국민에게 사죄하는 일이다.

   국민 누구도 말하지 않던 수도이전을 공약하고 정권을 잡은 그들은 그 공약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야당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국민을 설득하여 수도이전의 공감대가 확산되면 헌법개정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국민이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데 야당이 무슨 수로 반대하겠는가. 그러나 국민을 설득할 책임은 전적으로 노 정권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없으면 깨끗이 포기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롭고 나라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 때 그들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할 당사자는 없다. 헌재에 무슨 책임이 있는가. 야당에도 아무 책임이 없다. 야당이 반대해서 국민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반대하니 야당이 반대한다.

   헌재 결정을 떠나서도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도이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사업이다. 적어도 15년~20년 정권이 세 네 번 바뀌어야 완성되는 사업을 국민적 동의 없이 무슨 수로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노 정권은 수도이전을 빌미로 충청도 민심을 볼모삼아 20년 장기집권을 꿈꾸는 모양인데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노 정권은 헌법개정이든 사업 포기이던 빨리 결단을 내려야한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적 책임의 내용은 국민의 뜻에 따르면 된다. 중요한 것은 어설피 책임을 전가하려하거나 다른 무슨 대안을 내놓고 책임을 호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책임을 질 수도 없는 공약을 내놓고 그것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다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국민들, 특히 충청지역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정권이 무슨 낯으로 대안을 내놓는다는 말인가. 내놓은들 누가 그것을 믿는단 말인가. 노 정권은 이제 겸손하게 정도를 걸어야 한다.

   얼마 전 총리라는 사람이 “조선, 동아는 까불지 마라”, “동아, 조선은 내 손에 있다”라는 말을 하였다. 보도를 전제로 말이다. 아무리 선의로 해석하려 해도 되지 않는다. 언론이 권력의 손아귀에 있다면 이미 이 나라 민주주의에는 조종(弔鍾)이 울렸다는 말이 아닌가.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은밀하게 언론을 겁주었던 독재시절을 경험하고 이제 민주주의의 지평이 열렸다고 모두 믿고 있는데, 난데없이 권력이 언론을 향해 공개적으로 까불지 말라고 협박하니 이런 난폭한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어제 오늘은 또 휴전선 철책이 문제이다. 그 삼엄한 3중 철책이 뚫렸는데 군이 서둘러 우리 민간인이 월북한 것이라고 발표한다. 우리 국민 가운데 무슨 ‘람보’라도 있다는 말인가. 북의 공작원이 침투하였거나, 남에서 암약하던 북의 공작원이 월북한 것이 분명한데, 남의 민간인이라니! 어찌하다 우리 군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안보에 구멍이 뚫렸다면 국가보안법 폐지에 지장을 줄까 염려되어 그러는가. 군이 정치화되거나, 정치에 예속되어버리면 우리 안보는 어떻게 되는가.

(황중선 합동참모본부 작전처장이 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 최전방 철책선 절단 상황과 관련한 합동조사 결과 남측 민간인이 월북하면서 생긴 철책 절단으로 잠정 결론 지었다.)

   요 며칠 사이 나의 마음은 무겁고 우울하다. 뜻있는 사람들의 마음 또한 같을 것이다. 참으로 폭란(暴亂)의 시대이다. 진실도, 헌법도, 민주주의와 안보까지도 난폭하게 짓밟히며 찢기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힘 있는 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한다. 정상(正常)으로 돌아오라. 우리 사회의 보편적 상식과 가치로 귀의(歸依)하라. 지금 우리 국민들이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가. 경제의 활력과 미래의 희망이다. 그 갈망에 답하지 않는 한 민생의 안정은 이룰 수 없다. 이것이 그대들의 엄중한 책무임을 잊지 말라. 국민은 오래 참지만 교만한 권력을 용납한 적이 없다.

   러시아의 대시인 푸쉬긴이 노래했던가. “ 우울한 날들을 참고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난기류를 헤쳐 나가는 원천은 힘이다. 힘을 모아야 한다. 참고 견딤을 넘어 세상을 따뜻하고 정의롭게 만들 힘을 키워야 한다.

   폭란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통일과 번영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오늘 나는 다시 일어선다.

2004. 10. 28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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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뉴스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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