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달린다.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에서 강변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강남구 자곡동의 집까지 약 24km를 달린다. 작년 연말부터 골프를 멀리하고 자전거 타기를 시작했는데 정말 좋은 운동이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중소기업의 최고경영자 두 분이 꼭 자전거를 타보라고 권유해 온 것이다. 자기들도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그토록 즐기던 골프를 거의 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분들의 말이 틀린 소리가 아니다. 자전거의 매력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오늘은 마침 저녁 약속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일찍 퇴근을 하기로 하였다.

한강은 흐른다. 민족의 혼이 용해되어 흐르는 강이다. 태백준령으로부터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황해에 이르는 강. 소리없이 흐르는 강물 속에서 거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살아 온 선인들의 숨결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때마침 서풍이 불어 물결이 서에서 동으로 굽이친다. 마치 강물이 나와 함께 동쪽을 향해 흐르는 것만 같다. 그러나 한갓 바람이 어떻게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으리요. 한강은 여전히 황해를 향해 서쪽으로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을.

그러므로 바람에 흔들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흐름의 본질을 놓치고 표면의 현상에 매몰되어 사태를 잘못 판단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 시대의 진운을 거꾸로 가려다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던 구한말의 어리석은 역사. 한강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 어리석음을 결코 되풀이 하지 말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만 같다.

세계는 빠른 속도로 하나가 되어가고, 인간의 창조적 역량이 폭발한다. 그리하여 지구촌 시대가 열리고, 지식문명의 시대가 밝아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을 떨치고 문을 활짝 열어 세계로 나가야 한다. 권력은 개입의 유혹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무한의 자유를 허용하며 그들이 도전과 개척의 전선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과연 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일까.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강물 여기 저기 위로 점점이 이름 모를 철새들이 무리지어 먹이를 찾고 있다. 강가의 모래톱에는 오리떼들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다. 어디에서 날아 온 새들일까.

나는 지난 해 바이칼 호수를 여행한 일이 있다. 몽골의 울란바투르를 거쳐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마침내 꿈에 그리던 바이칼의 품에 안기었다. 징기스칸의 어머니 허엘룬이 태어나 성장한 아론 섬에서 하루 밤을 보낸 것이다. 지구 총 담수의 20%를 담고 있다는 바이칼의 위용 앞에             압도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가장 깊은 곳이 1800m가 넘는 이 호수의 파도는 바다 못지 않게 높고 거칠기만 하다. 그래서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일체 배의 출항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호수도 혹독한 시베리아의 추위에는 견디지 못하고 긴 겨울 동안 꽁꽁 얼어붙게 마련이다. 얼음의 두께가 1m 50cm에 이르기 때문에 대형 트럭들이 호수 위를 질주한다고 한다. 그러니 시베리아의 새들이 그 긴 겨울 동안 먹이를 찾아 이 곳 한강을 찾아 왔으리라.


한강에 철새들이 많이 몰려 올수록 그만큼 먹이 감이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지난 40여년 동안 한강의 생태계는 얼마나 긴고통의 터널을 달려 왔을까. 이제 한강은 다시 생명이 넘치는 강으로 태어나야 한다.

즐비한 새들의 무리를 바라보며 생명의 냄새를 맡는다. 비싼 값의 깨비아가 철갑상어의 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철갑상어가 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이 한강을 회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경기지사로 일할 때 상어만을 박제하는 전문가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연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본 멋진 철갑상어의 박제가 바로 60년대 초 한강에서 잡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한 2년 전 쯤인가, 나는 한 텔레비전 프로에서 철갑상어의 치어가 한강에서 잡혔다는 보도를 접하고 잔잔한 흥분을 느낀 일이 있다.

그렇다. 이제 한강을 생명이 충만한 강으로 만들어나가야지. 철갑상어가 회유하고 온갖 생태계가 복원되도록 해야지. 앞으로는 더 이상 자연이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지. 나는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중얼 중얼 생각을 이어 갔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도심의 미로가 아닌 강을 따라 달리다 보니 생명의 신비와 경외를 저절로 깨닫게 된다.

한강을 달린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문명의 숲이 보일 뿐이다.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는 도시의 빌딩들, 그리고 강변 좌우를 달리는 끝없는 자동차의 물결. 한강을 달리며 자연의 위대함과 생명의 신비함을 호흡한다. 문명의 탁류속을 숨가쁘게 살아가며 우리들이 잊고 있었던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말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으로부터 자연과 조화하는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말 그대로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출발한지 한시간 쯤 지나자 잠실종합체육관이 눈 앞에 보인다. 왼 쪽으로 탄천을 따라 달리면 탄천 본류와 양재천의 합류지점이 나온다. 종전처럼 탄천 본류를 따라 가기로 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비포장 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비가 온데다 공사 차량들이 다니면서 길을 온통 진흙탕으로 만들어 놓았다. 도저히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다. 다시 돌아나와 양재천을 따라 큰 길로 올라 선다. 그리고 보도를 달려 집에 도착하니 세상은 어두움에 싸이고 온 몸은 땀으로 젖어 있다. 몸과 마음이 새처럼 가벼워진다. 참으로 상쾌한 퇴근길이다.



200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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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재촉하는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대지 깊은 곳에서 성장을 준비해 온 생명들에게 은총처럼 스며들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라. 온 세상을 푸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두 주일 동안 지역구 주민들을 찾아뵙고 돌아와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 창문을 연다. 2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이다. 이미 겨울의 냉기는 사라지고 봄의 온기가 온 몸에 느껴진다. 하지만 멀리 남한산의 정상에는 하얀 눈이 보인다. 비에 젖은 대지와 눈 덮인 산의 정상이 참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내와 나는 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나는 자동차 운전을 좋아하여 주말이면 가급적 직접 핸들을 잡는다. 옆에 앉은 아내와 함께 두 딸이 어렸을 때 뒷좌석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나서면 언제나 잠을 자던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에 잠긴다. 우리는 그 때 그 길을 따라 가고 있다. 성남에서 남한산성을 넘어 광주로 나간다. 광주시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좌로 방향을 틀면 팔당호와 천진암으로 가는 길이다. 특별히 목적지를 정한 것도 없다. 우리는 한국 천주교가 100년의 계획으로 세우고 있는 대성당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문득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기지사로 일하면서 이곳을 두 차례 방문하였는데, 그 때 우리나라도 이제 100년 단위의 사업을 추진할 정도로 성숙하고 큰 나라가 되었구나 하면서 자부심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비가 내린 탓인지 이 날에는 참배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100년의 역사라, 아직도 80년 이상이 남아 있다. 5년여만에 다시 찾아 왔지만 그리 큰 진전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 1m인 화강석 24만 개를 사용한다고 하니 과연 얼마나 웅장한 건축물이 될 것인가. 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필적할 수 있을까. 나는 어린애 같은 호기심에 빠진다. 아, 80년 후면 우리 부부는 물론 내 두 딸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오는데 군데군데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 점심때가 되어서인지 더욱 또렷이 보인다. 그런데 그 간판들 중에 “돼지 고추장 숫불구이”라는 간판이 많이 있다.             나는 유난히 돼지고기를 고추장에 발라 구운 음식을 좋아한다. 아내도 가끔 이 요리를 하여준다. 나의 형수님들은 옛날 학창시절 내가 형님 댁에 간다고 하면 아예 이 음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셨다.                                    

시내에서는 이런 음식을 파는 집을 구경하기 어려웠는데 이곳에서는 이 요리가 인기 있는 메뉴임이 분명한 것 같다. 배도 고프고 호기심도 동하여 전통이 있어 보이는 한 집을 찾아 들었다. 1인분에 11,000원 하는 돼지고기 2인분을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한다.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여성이다. 내가 지사로 일할 때부터 너무 잘 알고 있다며 반가와 한다.

내가 말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손님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적군요.”
“예, 오늘 날씨가 흐려서 야외로 많이 나오지 않으셨나 봐요. 요즘 경기가 너무 나빠요.”
주인 아주머니는 아주 걱정 어린 표정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매상이 과거 이맘때쯤보다 얼마나 줄었나요?” “매상은 한 3분의 1정도 줄었는데 그것도 문제지만 더 골치 아픈 문제가 있답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근심과 걱정으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아니, 매상이 뚝 떨어지는 일보다 더 걱정되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긴장하며 주인의 설명을 들었다. 요즘엔 도대체 일할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한 달에 100만원을 주었는데 사람이 없어 120만원으로 올렸어도 일 할 아주머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 불법체류자를 모두 내보내면 이 음식점도 문을 닫아야 할 실정이란다.

“아주머니들은 다 어디로 가셨나요?” 나는 다시 물었다. “잘 모르지만 무슨 노래방에 가서 일을 하면 힘도 들지 않고 수입이 많아서 이렇게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답니다.” 주인의 대답을 들으며 그것이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지 내 마음도 무거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얼마 전 논산에서 만난 보험설계사 아주머니 한 분이 “이제 우리나라는 망했습니다” 라고 거침없이 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분의 설명은 농촌의 노인 어른들까지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들고 나와 로또 복권을 사기 위해 끝없이 줄을 서 있는 나라가 어떻게 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땀흘려 일하며 보람을 느끼고, 그렇게 하여 번 소중한 돈으로 알뜰하게 살아가는 정신이 뿌리 채 뽑혀 나가고 있다. 아, 어찌하다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왔는가. 국가를 경영해 보겠다고 나선 정치인으로서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식당주인 아주머니와 보험설계사 아주머니가 이렇게 절규하는데 막상 나라를 이끄는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참 숯에서 타오르는 파란 불꽃이 향기롭다. 거기에 익혀 먹는 고추장을 바른 빨간 돼지고기가 더없이 맛있다. 음식이 참으로 정갈하고 정성이 담겨 있다.

아내와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인 아주머니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도 나누었다. 아내는 옛날 숯불로 밥을 짓던 생각을 했는지 앞으로는 집에서도 가끔씩 숯을 쓰고 싶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아주머니가 떠나려는 우리에게 숯을 한 상자 들고 달려온다.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숯 값을 아주머니의 손에 쥐어드리고 그 집을 떠날 즈음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늦은 점심을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200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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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의 대표단을 이끌고 비극의 현장을 찾은 것은 사고 후 이틀이 지난 20일 낮이다.               

희생자 유가족들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신 채 더 이상 오열할 기운조차 보이지 않는다. 위로의 말을 전하는 나의 손을 잡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딱히 드릴 말씀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실종자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은 또 얼마나 오죽하랴.

그분들의 회의에 한동안 자리를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종자의 사망확인 절차가 신속하게 또 똑바로 진행되는지 가족들이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타당한 요구라 판단되어 배석한 책임자로부터 약속을 받아 주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채 연기에 질식되고 천도가 훨씬 넘는 고열에 녹아 이슬처럼 스러져 갔는지, 아직도 내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내가 경기지사가 된지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용인의 가출소녀 수용시설에서 몇 명의 소녀가 탈출을 노리고 방화를 하였는데 그만 20여명의 소녀들이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하고 연기에 질식되어 사망하였다. 그 때 일이 악몽처럼 떠올려진다.

또 임진강이 범람하여 연천과 문산이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발생하였을 때, 그래도 인명피해가 없어 얼마나 하늘에 감사를 드렸던가. 범람이 밤에 시작되었더라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연천은 아침에, 문산은 오후 3시에 침수가 시작되어 사람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던 기억이 새롭다.

우선 차량의 내장을 왜 불연물질이 아닌 유독성의 가연물질로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수출용 차량은 불연재를 사용하여 제작하는데 국내용 차량도 이렇게 했더라면 이런 참화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도를 보니 가격이 세배 비싸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시민의 생명의 가치는 어떻다는 것인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의 무게보다도 더 무겁고 고귀한 가치를 갖는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자동 정전이 되고, 암흑 속에서 잠긴 문을 열 수가 없었다는데, 이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안전 시스템이 이런 수준이라니 부끄러울 뿐이다.

결국 이번의 참화는 한 광인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이를 막지 못한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이 사회를 안전하게 관리해야 할 사람들의 그릇된 가치관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 자신부터 깊은 자책감을 억누를 수 없다.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이다! 이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가 진정한 문명사회일 것이다.

불을 지른다. 대구의 그 광인은 아마 자신의 행위가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몰랐을지 모른다. 불을 지르는 일은 참으로 위험하다. 무심결에 던진 담배 꽁초 하나가 온 산을 불태우며 소중한 생태계를 파괴하면, 그 복원에 얼마의 세월이 걸린단 말인가.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쏠리니 그리고 일본의 도조가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을 지폈을 때 그 전쟁의 폭풍이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몰고 오리라고는 다 예상하지 못하였으리라.
이렇게 불을 지르는 사람의 의도와는 다른 길을 따라 불길은 때로 상상하지도 못한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여러 갈등과 불신이 자꾸 높아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누군가 불을 붙이면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감을 느낀다. 잘못 불이 붙으면 시장경제의 활력이 소멸되고, 그토록 노래부르던 평화가 송두리째 날라가 버릴지도 모른다.

대구의 지하철에서 주위의 시민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그 광인의 무모한 행위를 제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소리도 자지러진 통곡의 강을 바라보며 숙연한 마음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떠나보낸 사람들과 아픔을 나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교훈을 얻는다. 늦기 전에 행동해야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불길이 솟아 오른 다음에는 이미 늦다.


200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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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와 싸우다(2)

내우(內憂)는 외환(外患)을 부른다


   중국이 역사 침략의 야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고대국가 고구려를 자기 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우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의 전신(前身)인 고조선과 동예, 옥저 등 고대국가는 어찌되는 것인가. 또 그 후신(後身)인 발해는 어찌되는 것인가. 우리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다 말아 먹자는 속셈이 아닌가. 나는 일찍이 영토의 침략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역사의 침략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작년부터인가, 언론을 통해 중국의 이 역사침략 기도가 연일 폭로되고 있는데도 이 정권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대응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반미 감정을 확산시키고, 앞으로 우리나라의 제1의 파트너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던가. 나는 지금 그들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어디 중국뿐인가. 일본도 최근 국수주의적 우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더욱 강하게 치고 나온다. 한일 정상회담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기자가 무엄하게도 한국의 대통령에게 독도 영유권 문제를 질문한다. 일본기자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지칭하며 질문할 때, 우리 대통령이 대한민국 영토에 독도는 있으나 죽도는 없다고 딱 잘라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발 더 나아가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에 시비를 거는 일은 국제사회의 정의에도 반하며 한일 양국의 이익을 해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세종대왕시대 복속시킨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일본은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라고 반박했다면 또 얼마나 명쾌했을까. 사실 대마도는 이종무가 1419년 정벌하여 우리 영토에 복속시킨 후 우리나라가 그 영유권을 포기한 일이 없다.

   그런데 이 나라 대통령은 그 질문을 받고 엉겁결에 다케시마 운운하며 얼버무리고 말았으니 국민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현대에는 군사력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다. 또 굳이 전쟁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거나 국가이익을 추구하지 않아도 다른 수단으로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시장은 개방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상호의존관계는 깊어만 간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나라는 무역이나 경제협력 등 경제적 수단만 가지고도 다른 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중국이 저같이 무도한 역사침략을 감행하고, 일본이 뻔뻔스럽게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우리를 깔보며 총성 없는 전쟁을 시작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그들이 우월한 지위를 확보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격하면 승리가 보장되는 유리한 시점이라고 믿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왜 그런 판단을 했을까. 또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나라가 내우(內憂)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극심한 분열과 혼란에 빠져있음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또 동북아시아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켜줄 힘의 균형추는 뭐니 뭐니 해도 굳건한 한미동맹이다. 그 동맹은 힘을 잃고 와해(瓦解)를 향해 한걸음씩 가고 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미국과의 동맹이 약화된 그 힘의 공백을 중국이나 일본이 우호적으로 메워줄 것으로 이 정권이 판단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고래(古來)로 언제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의 자주나 독립, 또 결정적 이해를 뒷받침해 준 일이 있었던가.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끝없이 우리를 침략하지 않았던가.

   보자.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이 극심한 분열과 혼란은 누구의 책임인가. 또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우리나라를 고립시킨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정권이다. 이 정권은 그저 국정의 최고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 그 이상으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은 내우를 일으켰고, 그 내우는 외환(外患)을 불러 온 것이다. 총성은 없다지만 우리보다 몇 배나 규모가 큰 인구, 국토 그리고 경제력을 가진 중국과 일본이 우리의 역사와 영토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으니, 이보다 더 심각한 외환이 어디 있단 말인가. 거기에다 우리 편을 들어줄 동맹도 사라져가고 있으니, 이 도전을 우리 힘만으로 감당해야 할 판이다.  

   과연 우리에게 어떤 수단이 있을까. 우리가 그들 나라와의 관계를 험악하게 몰고 가면 결국 나라 사이의 경제관계가 타격을 받을 것이다. 서로 간에 경제보복이 시작되면 그들이 받을 타격에 비해 우리가 받을 타격은 파멸적인 수준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일본이 이 사실을 읽지 않고 이런 엄청난 도발을 감행했을 리 없으리라. 그들은 때를 기다렸고, 우리는 멍청하게도 틈을 내준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이 도전을 극복해야 하나. 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방도는 무엇인가. 나는 이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왜 중국은 저렇게 이치에도 닿지 않는 황당무계한 짓을 벌이는 것일까. 우선 이것을 알아야 한다. 중국은 1992년 우리나라와의 수교 이전부터 수교 후 급속히 성장할지도 모르는 옛 만주(지금의 동북3성)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민족의식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용의주도하게 대비해 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족자치주에 한족 출신 인구를 늘려 60%이던 조선족의 인구비율을 40% 이하로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착수한 것이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이다. 중국의 동북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을 체계적으로 다시 연구한다는 것이다. 2001년 기획되고, 2002. 2. 18 중앙정부의 승인을 얻어 본격 착수되었다. 물론 결론을 정해놓고 벌이는 공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은 옛 만주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식이 팽창하여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 두려움이 역사침략이라는 선제공격을 가져왔다고 나는 믿는다. 설마 중국이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역사적, 과학적으로 접근해 보자. 중국의 주류민족은 한족(漢族)이다. 한족 이외에 55개 소수민족이 있다고 하지만 그 수를 다 합쳐도 미미하다. 특히 티베트를 제외하면 잠재적으로도 민족문제를 일으킬만한 소수민족이 없는 실정이다. 모두 다 중국에 동화(同化)된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 민족이 배후에서 독립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경우도 몽골과 한국을 제외하면 없는 형편이다. 몽골은 현실적으로 가까운 장래에 다시 위협적 존재가 되기 어려운 나라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분단의 악조건 속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그 기상 또한 호방한 나라이다. 수교가 되고 왕래가 많아지면, 특히 한국이 통일되어 더 강대한 나라가 되면 만주지역 조선족들의 민족의식이 폭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그들은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의 주류민족인 한족은 북방 민족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중국의 고대로부터 북방 기마민족, 유목민족의 침략 때문에 그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만리장성을 쌓았겠는가. 또 그 환경 좋은 도읍을 다 버리고 척박한 북경을 수도로 정했겠는가. 모두 다 그 두려움 때문이다. 중국 역사 가운데 거란족이 세운 ‘요(遼)’, 여진족이 세운 ‘금(金)’ 나라를  빼고도 북방 소수 민족이 전 중국을 지배한 통일왕조만 하더라도 몽골족의 ‘원(元)’과 여진족의 ‘청(淸)’ 나라가 있다. 수백년 간 중국 대륙을 지배한 몽골족과 여진족은 당시 인구수로 볼 때 한족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소수 민족이었다. 이 억센 북방의 소수 민족에게만 한족은 긴 세월 동안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을 갖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 중국이 그 역사를 말살하려는 고구려는 당연히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이다. 그 고구려의 위력은 어떠하였던가. 고구려와의 충돌과정에서 통일 왕조 ‘수(隋)’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당(唐)’이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우리는 먼저 중국의 이 두려움을 없애주어야 한다. 요즘 일부 책임있는 사람들이 고대사의 연구와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방도인양 말한다. 물론 그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이 싸움이 역사 이론의 우열로 판가름 나겠는가. 중국이 이론의 우위로 싸움을 걸어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중국과의 수교를 전후하여 지금까지 많은 우리 국민들이 만주지역을 방문하여 이곳이 우리 땅이라는 메시지를 얼마나 남발했는지 되새겨 볼 일이다.

   시대는 변했다. 이제 총칼로 영토를 넓힐 필요가 없다. 그 나라의 경제력과 문화의 영향력을 통하여 국민들이 더 넓은 영역에서 더 많은 기회를 향유할 수 있으면 되는 시대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각에서 중국의 불필요한 두려움, 그리고 그로부터 증폭되는 역사침략의 확대를 막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 민간 차원에서, 미래의 한중관계가 어떤 경우에도 영토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되며, 또 한국은 그럴 의지도, 이유도 없다는 것을 설파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내우(內憂)를 해소하여 국민적 단합을 이루고, 동맹을 강화하여 힘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우리가 튼튼하면 상대가 우리를 깔보고 덤비지 못한다. 우리가 분열되고 편들어줄 곳이 없으면 언제 또 어떤 침략이 일어날지 모른다. 내우를 해소하고, 동맹을 강화하는 문제는 지난 글에서 다루었던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그 출발이다.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통일이다. 이제 통일을 더 이상 두려워해서도 안되며, 지체해서도 안된다. 도대체 독일이 통일을 이룬지 얼마가 지났는가. 15년이 지나도록 마지막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통탄할 일이다. 우리가 통일을 이루고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면, 중국도 일본도 이렇게 우리를 능멸하지는 못할 것이다. 분단 상황으로 소진되는 우리 민족의 에너지를 하나로 융합, 폭발적 힘을 분출시켜 우리의 자존을 지킬 수 있는 근원적 길은 통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일은 벌어졌다. 냉철하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다. 허둥대거나 좌절해서는 안되며, 특히 상대의 강한 곳에서 우리의 약점을 노출시키며 확전해서도 안된다. 싸움을 언제 끝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의 도발로 우리 국민이 정신적 상처를 받고 기(氣)가 꺾이는 것이 아니라, 더 용기 있게 우리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단합을 이루며, 역량을 모아 통일을 성취하는 계기를 만들면, 결국 우리는 이 싸움에서 진정한 승자가 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일본에 대하여는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단합과 통일을 가장 두려워하는 나라가 바로 그들이다. 통일을 이룰 때 그들의 도발 의지는 꺾이게 된다.

   보라, 우리에게 밀려드는 저 높은 파도를. 그러나 타고 넘으면 그 뿐이다. 사실 도둑질해간다고 없어질 역사인가. 우리 민족의 영혼속에 살아 숨쉬는 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대륙을 호령하던 기마민족인 한민족(韓民族)! 그 웅혼(雄渾)의 기상을 드높여 미래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면 될 일이다.

 

2004.   8.   10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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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와 싸우다(1)

헌법의 두 기둥, 정통성과 정체성


   요즘 여야 간에 국가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논쟁이 한창이다. 한편 며칠 전부터 주요 일간지에 '노무현 정권 규탄대회' 광고가 연일 실리고 있다. 일부 우파단체는 이미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국가정체성수호를 위해 행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눈에는 결론이 다 난 정체성 논쟁이 한가롭게만 보일지 모른다. 하여튼 오늘 한나라당은 '헌법과 대한민국 정체성 수호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고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정권이 출범한지 1년 반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 문제로 여야가 정쟁을 일삼고 있으니 경제난과 사회불안에 시달리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혼란스럽고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정권이 나라의 정체성을 허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야 문제를 제기하는 한나라당의 무지와 게으름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고, 사실이 아니라면 가뜩이나 민생이 어려운데 공연히 생트집을 잡고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또한 다른 쟁점이라면 몰라도 이 문제는 타협이 불가능하다.국가의 기본가치인 정체성 문제를 두고 어떤 타협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정당간의 타협이란 것도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당은 이제 논쟁을 그만 하자고 하고, 한나라당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모습이다.

   나는 이미 2002년 경선 당시부터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투쟁해 왔다.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으며, 결국 나라의 안보와 경제가 미증유의 재앙에 직면하리라는 점을 쉬지 않고 말해 왔다. 그 때 야당은 물론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침묵 내지 방관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이 정권 출범 1년 반이 지나고 경제와 안보의 지형이 악화 일로(惡化 一路)를 걷고 있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민간 일선은 행동에 나서고 야당은 문제 제기에 나서고 있는 형편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할 때'라는 말이 있다. 이왕 문제가 제기되었으니 끝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미루자는 말이 아니다. 할 일은 하면서 이 국가 근본의 문제를 풀어내야만 한다. 나라의 기둥인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고 사회의 안정이나 경제의 번영, 그리고 평화적 통일은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 개인에게도 뚜렷한 자기 정체성이 요구되는데, 하물며 한 나라가 뭐가 뭔지도 모르는 정신적 혼돈(混沌)과 우왕좌왕하는 자세로 나아간다면, 그 나라의 앞날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상상하기도 끔찍한 비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최근 진행되는 논쟁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표피와 감성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헌법의 수호를 책임지고 있는 당사자 쪽에서는 철저한 무시와 기만 그리고 위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웬 정체성 타령이냐, 우리 헌법이 곧 내 사상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수십 번도 더 하지 않았느냐" 대략 이런 대응을 하면서 국민을 속이고 국면을 호도하며 시간을 벌려고 한다.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대의민주제를 근본가치로 한다. 그런데 이 정권의 권력자가 의회의 권능을 부인한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맹목적인 추종자들을 모아 놓고 시민혁명을 선동한 것은 또 무엇인가.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을 하면서 헌법위반 사실을 준엄하게 꾸짖었는데도 단 한마디 사과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수 없이 했다고 하는데 나는 단 한차례도 들어 본 일이 없다. 반대로 대중민주주의를 운위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다.

   우리 헌법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방어적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는 개념이다. 즉, 모든 사람이 자기의 세계관과 가치를 향유할 자유를 가지지만, 다만 그러한 자유를 부정하는 사상, 예컨대 계급독재의 공산주의 사상이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 사상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이다. 그렇다면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기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박해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용납될 수 있는가, 없는가. 수도이전이라는 정책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하여 재갈을 물리려는 행동은 또 무엇인가. 갑자기 튀어나온 공산당 허용 발언은 또 무엇인가.

   나는 국민의 위대한 힘을 믿는 사람이다. 한 두 번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불의(不義)한 권력은 국민의 냉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正統性, legitimacy)은 국가관과 역사관의 산물이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이 한민족의 법통(法統)을 잇는 정통국가임을 선언한다. 1945 년 해방 이후 냉전의 격화로 인해 당연히 통일국가가 건설되었어야 할 한반도에 분단상황이 고착된다. 이 분단 때문에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통해 건국하였으나 대한민국은 민족국가의 대(代)를 잇는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이며, 북한은 우리 민족 내부에서는 국가일 수 없고 단지 평화통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협력해야 할 대상에 불과한 존재이다. 이것이 우리 헌법이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다.

   이에 반하여 북한은 정반대의 국가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미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식민지라는 것이 그들의 공식 입장이다. 그래서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한을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일으킨 6. 25도 그래서 인민해방전쟁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헌법에 충성하는 모든 국민은 따라서 북한의 이러한 국가관과 역사관을 부정해야 한다.

   여기에 남북한을 대등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s, 시카고 대학 교수)의 수정주의 사관이 그 대표이다. 그러한 관점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가능할지 모르나 냉엄한 현실정치의 세계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굳이 말한다면 한반도의 분단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나라에서나, 또 먼 훗날의 역사적 시점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이론에 불과하다. 그런데 분명 오늘 우리 사회에는 우리 헌법이 말하는 국가관과 역사관을 부정하거나 벗어난 관점에서 남과 북을 이해하고, 분단의 역사를 해석하려는 사람과 집단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이 학문의 영역에만 머물러 활동한다면 오늘의 이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까닭이 없다. 그들이 사회의 운동 전선에, 또 권력의 전면에 전개되고 강력한 연대를 형성하여 반세기가 넘게 헌법을 떠받쳐 온 정통성과 정체성의 두 기둥을 뿌리 채 뽑으려 하는 것이다.

   간첩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이 어떻게 우연일 수 있겠는가.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반미선동은 그 뿌리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외세에 빌붙어 동족을 핍박한 반역행위는 마땅히 청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권력이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한 전제 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단지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국가권력이 나선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봉건 전제군주도 선대(先代)의 역사를 쓰는 사관(史官)의 사초(史草)조차 열람할 수 없었다. 오늘 집권세력이 친일 반역행위를 조사하겠다는 것은 처벌을 통한 청산을 전제로 하지 않고 있음이 명백하다.  자기들의 권력으로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것인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서 역사가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이 나라를 건국하고 발전시켜 온 주도세력을 친일 잔재로 규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허물려 한다. 나는 추호도 친일반역행위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에 찬성할 수 없을 뿐이다.

   보라!  이렇게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이 정체성 논란의 바람은 그저 지나가는 일과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어떻게 결론지어지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갈리게 되어 있다. 뿌리는 깊고 상황은 심각하다. 갈 길은 멀고 험난한데 엉뚱하게도 이 근본의 문제에 발목이 잡혀있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는 법이다. '푸른 물결에 띄우는 편지'에 썼던 기억이 난다. 어떤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 헌법으로 돌아가면 된다. 몇 몇 사람이 아니라 우리 국민 대다수가 헌법으로 돌아가면 헌법의 배신자들이 서 있을 땅은 없게 된다. 정통성과 정체성의 문제는 말끔히 해결될 것이다.  

   헌법으로 돌아가자! 그 속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신과 가치가 함축되어 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경제 번영의 길, 평화 통일의 길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헌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터무니없는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헌법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말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서둘러야 한다. 그보다 더 높은 가치는 없다. 그 깃발이 찢기면 우리가 염원하는 번영과 통일의 길도 막히게 된다.

   헌법으로 돌아가면 된다. 헌법의 정신과 가치를 우리 가슴속에 채우자. 그러면 헌법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

2004.  8.  5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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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와 싸우다(0)

나는 무엇을, 왜, 쓰려하는가?

   나는 2004. 5. 17 체포영장에 의해 검찰에 강제 연행되고, 이틀 후인 5. 19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나의 생애에서 대학시절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운동에 헌신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유치장에 갇혀보고, 당시 비밀경찰인 중앙정보부에 두 번이나 끌려가 일주일씩 감금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난 경험은 있지만, 이렇게 정식 사법절차에 의해 구치소에 수감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짧지만 낯선 수감생활에서 나는 날로 새로워지는 나를 발견하며 운명의 신께 감사를 드렸다. 1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서 나는 더 큰 자유의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고, 멀리만 느껴지던 하늘의 뜻(天心)과 국민의 마음(民心)이 내 가슴의 용광로에 하나로 용해되어 타오르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경이로운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나와 꿈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열정, 바로 그것이 나에게 불굴의 용기를 가져다 주었고, 그 용기가 나의 길지 않은 생애를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편견, 독선, 교만 그리고 나태함으로 얼룩진 지난 날의 내 삶에 나의 눈물을 쏟아 부어 때를 씻어낸다. 맑아진 나의 눈은 더 넓고 더 멀리 세계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열린 나의 마음은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모든 변화의 중심을 이루는 민심(民心)의 열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내 내면의 세계에서 그토록 소중하게 가꿔온 ‘자유의지’가 이제 날개를 달고 훨훨 창공을 날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이 축복은 전적으로 ‘꿈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준 선물이다. 나는 그 고마움의 표현으로 어린 시절 공부하던 앉은뱅이 책상을 닮은 밥상 위에서 편지를 썼다. <푸른 물결에 띄우는 편지>를 쓰며 나는 언제나 벅찬 행복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나를 찾아와 격려하여 주신 분들, 정성스럽게 눈물겨운 편지를 써 보내주신 분들, 쉬지 않고 보내온 전자우편(E-mail)에 사랑과 믿음을 듬뿍 담아주신 분들, 내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198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난과 영광을 함께 해온 동지들, 그리고 멀리서 가까이서 시대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숨쉬는 모든 분들에게 나의 작은 마음을 담아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 편지도 7. 21 내가 보석으로 풀려나면서 끝이 났다. 17번째 편지를 쓰다가 내 좁은 방의 문이 열린 것이다. 내 방의 비둘기 부부가 두 번째 알을 품은지 18일 만에 두 알 중 하나의 알에서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나온 날, 나는 정든 비둘기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나는 중단된 17번째 마지막 편지를 나의 서재에서 썼다. 편지는 끝났지만 우리들이 함께 꾸는 꿈은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게 아니라 더 크고 아름답게, 더 높고  뜨겁게 피어오른다.  

    보라!  바다는 폭풍우에 휩싸여 있다. 폭풍의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꿈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꿈을 꾸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나는 그 싸움의 전선(前線)에 서서 헌신하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며 나의 마땅한 도리이다. 나는 일찍이 뱃사람으로부터 바다의 지혜를 들은 일이 있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예상치 못한 태풍을 만났을 때, 살기 위해 뱃머리를 육지로 향하고 도망치면 반드시 높은 파도에 뒤집히거나 암초에 좌초하여 생명을 잃게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사의 각오로 뱃머리를 태풍이 불어오는 쪽으로 향하고 출력을 최대한 높여 바람과 파도를 치고 나가면 살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말했던가. 필사즉생(必死卽生)이요, 필생즉사(必生卽死)라. 바다에도 그 진리는 그대로 통용되는 모양이다.  

    2004년 오늘, 우리 사회는 폭풍에 휩싸인 바다와 같다. 치세(治世)인가, 난세(亂世)인가로 묻는다면 열의 여덟은 서슴없이 난세라고 말하리라. 그러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바다의 폭풍도 따지고 보면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원인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결국 소멸의 길을 밟게 된다. 두려워 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이 회오리바람이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것만 같은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힘을 잃어간다. 우리와 우리의 선대들이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더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은 앞날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상황에 직면할 줄을 몰랐던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오늘의 상황이 반드시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쉬지 않고 말해왔다. 역사의 진행에 가정(假定)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미 닥친 폭풍이 우리의 냉엄한 현실일 뿐이다. 이제 싸워 극복하는 길밖에 남은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를 감싸는 두려움과 공포심을 이겨내는 일이 우선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폭풍 또한 사회과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원인이 있고 예상되는 행로가 있으며 일정한 조건이 성취되면 소멸하게 된다.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불안과 공포심은 사라진다. 지혜와 용기로 싸워 이기는 일만 남게 된다.


   나는 앞으로 ‘꿈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같이 미쳐 날뛰는 파도와 싸우고 거친 바람을 이겨 나가는 문제에 관하여 말하려 한다. 그리고 그 폭풍의 바다 너머에 펼쳐질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희망과 번영 그리고 통일의 바다를 꿈꾸려 한다.

   오, 꿈꾸는 자에게 축복이 있을 진 저!  오, 지혜와 용기로 싸우는 자에게 신의 가호가 있을 진 저!

2004.   8.   1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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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정반대의 원형을 대표한다. 합리적이며 냉철한 지성, 객관적 판단력과 직선적이고 명료한 사고를 대표하는 두뇌형 인간인 아폴론은 감정적으로 격렬하며 심리적으로 폭발적인 충동, 모순과 대립의 병존을 대표하는 감정형 인간인 디오니소스에게 끌리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신화에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은 델피 신전을 공유한다. 두 남신은 델피에서 다같이 숭배를 받았는데 겨울 석달 간은 디오니소스가, 한해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아폴론이 숭배되었다. 전통적으로 이 두 남신은 반대 성격의 원형을 대표한다. 그러나 만일 한 인격 속에 이 두 남신의 원형이 함께 있다면 그것을 서로를 보완해 주는 기능을 하며, 특히 서로의 장점들을 상호 작용시킨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격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다.

이인제 국민회의 당무위원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원형이 복합적으로 깃든 인물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쑥스럼움을 잘 타는 내성적이며 여성스런 면을 가지고 있지만, 외면적으로는 뛰어난 두뇌와 명석하고 합리적인 판단력으로 상황을 개척해 나가고 사회속에서 확고한 자기 위치를 굳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가 가진 감정적인 폭발력과 모험적인 파괴력은 종종 중대한 순간에 그를 ‘도박’적인 행동에 나서도록 충동질하면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길 좋아하는 아폴론적 기질을 돌파해낸다.

아폴론은 확실한 가능성에만 자신을 내걸지만, 디오니소스는 확률 게임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신념에 의존한다. 즉 승률이 10%밖에 되지 않는 게임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을 파괴해 버릴지라도, 이것이 디오니소스다.

이 위원은 실제로 여러 번 그런 게임을 치렀다. 지난 대선 때만해도 그랬다. 1997년 3월 하순 그가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만 하더라도 당내에서나 언론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여론조사를 통해 나타난 지지도에서도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일부에선 ‘무모한 도전’이라고까지 받아들였었다. 물론 그 이전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깜짝 놀랄 젊은 후보’ 발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지만, 정치적으로 무일푼 상태에서의 그의 도전은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TV토론을 거치면서 그의 대중적 지지도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고, 이인제 바람을 일으키며 정가를 강타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태풍이었다. 대통령 후보 경산에서 2위를 차지하여 이회창 후보에게 패하긴 했지만, 사실상 그는 정치적으로는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의 정치적 모험은 일단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파격은 신한국당 경선에서의 패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경선 승복’ 선언을 뒤집고 결국 신한국당을 탈당한 후 국민신당을 결성, 독자적인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또 한번의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는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40대 젊은 기수로서 과거 김대중, 김영삼 양 김씨가 보여주었던 것과 유사한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사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은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1987년 국회의원 선거 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안양에 출사표를 던져 당선된 것이라든지, 지방자치 선거 때에도 당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굳이 당내 경선을 고집한 것이라든지 하는 일이다. 그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모험심 강한 아폴론이다.

이인제 당무위원에게 흔히 부여되는 ‘과감한 돌파력과 추진력’, ‘솔직 담백함’이란 장점은 바로 그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원형의 발현이며, 또 다른 한편의 ‘똑똑하다’, ‘차갑고 냉랭한 이미지다’라는 측면은 그의 아폴론적인 일면이 바깥으로 투사된 것이다. 즉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모순된 기질이 그에게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고, 그것이 대중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과단성과 추진력은 결코 그가 다른 정치인들보다 젊기 때문에 ‘패기’가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실 디오니소스는 ‘영원한 젊은이 상’을 대표한다. 디오니소스의 패기는 때로는 좌충우돌하기도 하지만 그 일면이야말로 나이와는 관계없이 늘 ‘젊은이’ 이미지를 유지하는 요인이다. 50세가 넘은 그에게서 청년기질이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졌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의 면모는 물론 아폴론적인 측면이다. 그가 자신의 아폴론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발휘해 온 것은 어쩌면 청소년기의 혹독했던 가정환경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다른 무기가 없었고, 그의 타고난 두뇌를 최대로 잘 활용하여 마침내 사회적인 성공을 거머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만일에 그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면, 그는 어쩌면 똑똑한 불량학생으로 자라나거나 혹은 법관의 길이 아닌 문학이나 예술방면으로 진로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 1960년대에 전 사회를 들끓게 했던 히피운동이 결국 디오니소스적 운동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분히 디오니소스적 기질을 가진 그가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는 모범생으로 자라나리라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아폴론적인 힘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것을 영민한 머리로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면은 김중권 청와대비서실장과 비슷한 경우이다.

그는 1948년 충남 논산에서 4남 2녀 중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가난한 농군이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월사금이 없어서 9살이 되도록 초등학교에도 입학을 못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논 몇 마지기를 어렵게 부쳐 생계를 이어가는 소농집안에서 4남 2녀를 모두 고등학교까지 보낼 수가 없어서 장남과 차남은 중학교만 마치고 상경해서 일찍부터 가족을 위한 생업에 종사해야 했다. 어머니는 돼지를 기르고 가마니를 치며 생계를 거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이 위원은 내성적이고 과묵한 성격의 소년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고, 초등학교 때는 혼자서 선생님을 좋아한 나머지 선생님이 되길 꿈꾸었던 감상적인 소년이었다. 집안 형편상 중학교 진학마저 어렵게 됐을 때 그는 “시험을 잘 봐서 5등 안에만 들면 돈 없이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며 부모를 설득, 논산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기도 했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부인 김은숙 씨를 만났는데, 김씨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들은 논산여중의 학생회장과 논산중학교 학생회장으로 논산 지역 중학교 학생회장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이 위원에게는 그녀가 첫사랑이었고, 그 첫사랑이 자신의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무려 10여년의 연애 끝에 결혼한 케이스다.

부인 김은숙 씨와의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위원의 여성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일면이 아주 잘 파악된다. 지난 대선 때에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부인 김은숙 씨는 일종의 ‘여장부’스타일이다. 전형적인 아테나형 여성이다. 좋은 의미로는 ‘힐러리 스타일’이기도 하고, 나쁜 의미로는 ‘치맛바람형’으로 보여지기도 하는 스타일이다. 아폴론적 이미지로 각인된 이 위원에게 그런 강한 이미지의 부인은 안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시각이 대체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그의 디오니소스적인 성향을 이해하면 다 풀린다.

디오니소스는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남신이다. 디오니소스는 오르기아라고 불리는 의식에서 여성들의 광적인 숭배를 받았던 신이다. 그리스의 여성들은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세계에 빨려 들어가 포도주와 광란의 음악 속에서 황홀경의 춤을 추었다. 디오니소스는 자신이 모성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며 여성들로 이루어진 단체를 훨씬 더 좋아하는 남성의 원형이다.

이런 디오니소스적 기질이 다분한 이 위원에게 아테나적 기질이 강한 그의 부인은 좋은 반려자가 된다. 그는 사회 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위치 때문에 아폴론적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그의 성인 가정으로 돌아오면 디오니소스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집에서는 직접 상을 닦고 과일을 깎는 등 부드럽고 온화한 가정적인 남자로 변신한다. 아내보다 한 달 먼저 미국에 도착한 그는 지도를 들고 주변 지역을 사전답사한 후 뒤늦게 온 아내에게 관광 가이드를 했다고 한다. 또 같은 종류의 음식을 두 번 먹지 않을 정도로 별미 식당을 찾아다니는 왕성한 탐험가적 여행객의 모습을 보였다. 지난 6개월의 미국 생활동안 그의 집을 방문한 손님들은 늘 그가 깎아주는 과일을 먹었다.

그가 법관이 되도록 이끈 것도 부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는 내성적이며 문학적 취미를 가진 소년으로 책읽기를 좋아했는데, 자신의 여성적인 내면을 극복하기 위해 강한 남성의 상징인 군인이 되기를 꿈꾸던 소년이었다. 이는 여성적인 내면을 가진 니체가 자신의 소심함과 내성적인 면을 보강하기 위해 군인을 동경하기도 했고, 강한 남성적인 철학을 구사한 것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 때가지만 하더라도 역사책을 읽으며 나폴레옹이나 이순신, 을지문덕 같은 전기에서 감명을 받으며 군인의 꿈을 키웠지만, 고등학교 때 한창 열애 중이던 김은숙 씨가 편지를 보내 장래 법관이 되는 게 좋겠다는 충고를 했던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의 전기를 읽으며 서서히 나폴레옹의 꿈 대신 링컨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마침내 서울대 법대에 진학함으로써 그 꿈을 구체화하기에 이르렀다. 디오니소스적 기질이 다분한 그에게는 여성 아폴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테나적 기질의 부인이 그의 충동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가 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디오니소스적 기질을 간직한 채 러시아 문학에 심취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데 더 열중하는 소년이었다. 영화는 거의 빼놓지 않고 보러 다녔으며, 펄벅의 『대지』를 읽으며 그 감동으로 밤잠을 설치던 문학 소년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는 2학년 말에 다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냉정을 되찾고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양복기술을 배우며 단칸방에서 살고 있던 큰형 덕제 씨에게 얹혀 살며 학교를 다니던 구차한 환경에서 언제까지나 낭만적인 꿈만 꾸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의 아폴론적인 기질이 그에게 다시 목표를 되찾게 해주었고, 그의 목표는 서울대 법대와 법관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그 목표를 달성했다.

아폴론의 장점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쉼없이 정진하는 데 있다.

탁월한 분석적 두뇌를 가진 아폴론에게는 그 목표가 현실적이기만 하다면,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다. 일에 관한 한 아폴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완벽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대학시절에도 전형적인 아폴론적 인물처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분석하고 관찰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디오니소스적 기질이 그를 학생운동으로 끌어들였고 3선개헌 반대투쟁, 전태일 분신사건, 교련 반대 시위 등에 참여하며 학생운동가로 활동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디오니소스적인 소년은 아폴론적 합리성을 단련하게 되었고, 남성들과의 조직적인 협력에도 적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아폴론이 아니었던 그는 결코 법관으로서 평생을 지낼 수는 없었다. 이 대목이 박철언 자민련 부총재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박 부총재는 정치인이 되기 전까진 전형적인 아폴론으로서 아폴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 중 하나인 검사로서 맹활약을 했었다. 1980년대 초의 정치적 격변과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정치권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검찰 수뇌부로까지 승진할 그런 기질의 남자였다. 그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달리는 데 익숙하지 낯선 길에 도전할 사람은 아니었다.

반면에 디오니소스적 기질도 강한 이 위원은 1981년 대전 지방법원 판사로 법조계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판사 생활 2년 만에 과감히 사표를 던져버린다. 들끓는 디오니소스적 기질을 가진 인물에게 오로지 객관적인 법률적 판단만을 중시하고 체제를 수호하는 입장인 판사라는 직업은 결코 매력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노동인권 변호사로, 그리고 거기에서도 다시 한 번 변신을 거듭하여 정치계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의 속에 있는 아폴론은 ‘두뇌’가 요구되고,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자신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그는 1988년 13대 국회 때 국회 광주항쟁 청문회 때부터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다. 아폴론의 객관적이며 논리적인 분석력, 꼼꼼한 일처리 솜씨는 당연히 TV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초선의원이면서도 청문회 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1993년 김영삼 정부 때는 최연소 장관으로서 노동부장관에 입각되었다.

그와의 첫 인터뷰는 노동부장관 시절에 이뤄졌다. 난처한 현안과 관련된 질문에 표정 하나 변함없이 똑떨어지게 논리정연한 답변을 하는 그를 보고는 단박에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대선 기간 중 많이 바뀌었다. 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이 합당을 하고, 그가 미국행에 오르기 직전에 한 행사장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부드러운 농담도 건넬 만큼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적 모습을 두루 본 셈이다.

아폴론적 기질을 가진 그는 누가 보아도 똑똑하기 그지없다.

그가 지난 대선 때에도 그토록 급작스럽게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TV토론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도 그런 전례가 있다. 바로 1960년대에 케네디와 닉슨이 경우다. 젊은 케네디는 노회한 정치인인 닉슨을 TV토론에서 녹다운시켰다. 이 위원도 그런 스타일이다. 국민들은 TV토론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논리정연함, 그리고 상대적으로 젊은 그가 보인 패기와 박력에 엄청난 기대를 걸게 되었던 것이다. 대선TV토론은 그에겐 1988년 국회 청문회 때 쌓아두었던 경험을 재활용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폴론 인물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아폴론적 단점이 그에게도 치명적으로 나타난다. 쉽게 말하면 아폴론은 너무 똑똑하고 잘난 것이 탈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도 문제다. 그는 모든 분야에 대해 정확하고 순발력 있게 파악해 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거기에 호기심까지 많아 박학다식하다. 그래서 어느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막히지 않는다. 말 한두 마디면 이야기의 핵심을 간파해낸다. 탁월한 지적 감각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미국 체류 중 이야기다.

우리나라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한 학생이 “미국에서는 가진 자들이 사회에 부를 헌납하는데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문화인데 우리나라 부자들에게도 그런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유심히 듣던 그는 다른 자리에 참석해서 이를 ‘아너리즘(Honorism)'이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후 자신의 소신으로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듣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논리와 즉각적인 센스를 겸비한 인물이다.

자신이 그렇다 보니 남의 얘기를 귀담아 듣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에만 의존하려 하며, 타인들을 잘 챙기지 못하는 면이 있다. 독단적이고 은근히 권위적인 아폴론적 일면이 그에게 고스란히 나타난다. 결국 자신의 주위에 모인 참모들을 챙기지 못한다. 참모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고 잘 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정치적 대부였고 그에게 정치를 가르쳐 줬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똑똑하지는 않지만 정감 어린 태도와 사람을 사로잡는 특유의 인간미로 똑똑한 사람들을 참모로 거느렸다. 주위 사람들이 모든 걸 걸고 도와주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타고난 친화력을 가진 인물이 김 전 대통령이었고, 그것이 그의 주요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러나 이 위원은 참모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분석가이자 기획자이지만, 모든 일을 혼자서 판단하고 처리하려는 강한 욕망을 내보임으로써 전체를 이끌어 가는 그룹 내의 리더로서는 한계가 있다. 잘난 체 하며, 자신의 두뇌를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그의 일면 때문에 지난 대선 때 그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이 곁을 떠나 지금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다. 자칫 잘못하면 ‘독불장군’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잔정을 베풀어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해 버려서 타인들에게 쉽사리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는 대중정치인 스타일이 아니라 어쩌면 매스컴 정치인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인간관계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면이 아폴론이면서도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자인 디오니소스적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단면인 것이다.

이런 아폴론적 고집과 디오니소스적인 개인주의가 정치 지도자로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이 아폴론적인 뛰어난 두뇌와 디오니소스적인 과단성이 그를 성장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다면, 중진급 정치인에서 그야말로 대통령 후보급 정치인으로 성장하려는 지금 단계에서는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조직과 자금력, 세몰이’가 중심인 한국 정치의 현실탓이기도 하다.

만일 그가 미국에서 정치를 한다면, 그이 약점인 조직이나 세몰이 없이도 곧장 매스컴을 통한 여론적 지지와 정책적 비전으로 승부를 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대선 때에도 이미 그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나고 말았다. 그에게 부족한 조직과 자금, 세를 결집하기 위해서 ‘국민신당’이라는 당을 급조했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힘겹게 만들었던 국민신당이라는 당조차도 키워내지 못하고 공중분해시키고 말았으니 말이다.

한국에서는 정치 9단이라는 정치적 입신(入神)의 단계에 오르려면 당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이때의 당이란 물론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원내 의석 20석 이상의 국회의원들을 충성스런 계보로 거느릴 수 있고, 자신의 정치력으로 당선시킬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 국민회의에 들어가 있는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다.

비록 지난 대선 때 엄청난 국민적 지지력을 과시했지만, 국민의 여론이란 대단히 변덕스러운 것이다. 박찬종 씨의 몰락이 이를 쉽게 반증한다. 그런 국민적 인기란 마치 대중스타의 순간적 인기와 비슷한 것이고, 또 국민들은 쉽게 잊어버린다. 특히 지난 대선 때에는 ‘박정희 신드롬’이 박정희를 닮은 그의 외모에 큰 역할을 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즉 IMF라는 위기 상황이 박정희를 닮은 그에게 박정희와 같은 도전적이고 강력한 지도력을 기대하는 심리를 부추겼던 것이다. 이 점은 ‘5백만표’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에겐 탁월한 두뇌와 디오니소스적 과단성이라는 정치적 강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 정치계에서 3김씨와 같은 거물급으로 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똑똑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거기에 플러스 α가 필요한 것이 한국 정치계다. 지금 그에게는 든든한 뿌리가 없다. 물론 기존 정당에서 그를 차기 후보로 밀어주기만 한다면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차세대 주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정당 내에는 이미 자신의 계보를 거느린 중진들이 서로 각축전을 벌이며 차기를 노리고 있는 상태다. 그는 지금 국민회의에 몸을 담고 있지만 당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여전히 애매모호한 상태이고 당내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만일 내각제가 된다면 당을 뛰쳐나오겠다고 공언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는 또 한번의 ‘정치적 모험’을 하는 셈이다. 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이라는 거대한 두 당 사이에서 홀로 어떻게 생존하며, 또 다음 대선에 무엇을 무기로 승부를 걸 것인가?

한마디로 그에게 부족한 것은 헤르메스적 원형이다.

헤르메스는 전령의 신이다. 뛰어난 친화력으로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대화와 타협을 이끌어 내는 신이다. 헤르메스는 자신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타인들의 목소리를 담아서 융화해 내는 타입이다. 그런 친화력이야말로 정치에서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미덕이다. 정치란 결국 조직적인 투쟁의 장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헤르메스적 기질이 뛰어난 이종찬, 이수성, 김상현, 김윤환 같은 인물들이 늘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며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위원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이런 자신의 단점을 깊이 숙고하여 헤르메스적 원형을 개발해 나간다면, 그의 정치적 장래는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현재 경향신문사 뉴스메이커부 임희경 기획위원이 지난 98년 출간한 『그들 속의 神 (우리시대 정치인 20명 캐릭터 분석)』에 게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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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호사였던 이인제 후보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판사직을 떠나서 변호사 개업을 한지 약 일년 쯤되었을 때였다.

그때 절친한 친구가 딱한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그가 어려운 사건을 맡아 승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료변론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마운 일을 나의 친구뿐만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의아해하는 내게 친구가 인사하러 가는데 동행하자고 하여 같이 찾아간 곳이 시청앞에 있는 그의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첫 인상에 그는 지적이고 겸손하고 온화한 평범한 동년배였다.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고마운 뜻에 감동하여 특급호텔 고급식당에 예약을 해놓고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친구가 간곡하게 요청하자, 따라나선 그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해장국집이었다. 진수성찬보다 친구의 마음을 받겠다면서 그릇을 비우는 그가 소박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 하나가 되지 않을수 있겠는가?

그리고 2년후 그가 낯선 곳인 안양에서 국회의원에 출마를 한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다. 나는 그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친구와 함께 유세장으로 그를 찾아 나섰다.

어디서 그토록 유창하고 후련하게 가슴을 치며 유권자를 압도하는 힘이 솟구치는 것일까? 그의 힘차고 논리적인 연설에 감동한 친구가 속삭였다. “미래의 대통령감이다!”

그랬다. 정치입문 석 달만에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국회로 진입한 그는 가시밭 정치현장에서 정도를 걸어와 오늘에 이르렀다.

그 성장의 힘은 지위는 변해도 불변의 의리와 능력을 지닌 그의 인간 됨됨이에서 발현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엄청난 힘을 보여줬다.

나는 <왕건> 촬영을 하면서 힘이 들때마다 이인제 후보를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우리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오늘날까지 정을 나눠왔기에 나는 그의 그릇을 안다.

이인제 후보! 그는 정이 깊고 아픔을 알고 힘과 능력이 있는 지도자이다. 내가 그를 지지하는 이유이다.


2003/01/30 11:01
탤런트 서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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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민주당 대표
“도덕성을 갖춘 사람, 이인제 부탁해요”

박상천 대표는 지난달 19일 이 후보의 광주방문에 동행한 데 이어 이날도 '고흥군민의 날' 행사에 이 후보와 나란히 참석해 힘을 실어주고 광주 기자회견에도 동행해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충청 출신인 이 후보가 유일한 대안으로 호남에서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강조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상천 민주당 대표는 적극적으로 이인제 후보와 함께 전국을 돌며, 민주당과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 상승과 대선승리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김민석 최고의원
“이인제 후보 능력 있잖아요”

공동선대위장을 맡은 김민석 전 의원은 대선 필승 구호를 소개했다. “‘다시보자 이인제, 만져보자 이인제’로 정했다”면서 이는 유종필 대변인의 제안으로 박상천 대표가 승인하면서 “이번 대선에서 이 구호를 통해 ‘이인제 다시보기’가 시작되고 오늘의 선대위 출범은 이인제 다시보기 운동의 출발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자신이 “지난 당내 경선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이인제 후보가 준비된 대선 후보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밝히고 정치는 현재의 여론을 바꿔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는 10배의 의석수와 언론의 독점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16~17% 정도 밖에 못 미치는 것은 개혁 진영의 대표선수를 이인제 후보로 바꿔야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장  상 (前)국무총리서리
“준비된 후보 이인제! 대통령감 아닌가요?”

장상 전 국무총리서리는  "50년간 정의와 평화의 가치로 싸워온 민주당의 대선후보 선출은 12월 19일 승리를 위한 것"이라면서 "후보로 결정된 분에게 미리 큰 축하를 드린다"고 말했다

11월 12일 호남에서 열리는 광주지역 선대위발대식에도 참여해 이인제 후보의 당선을 전 국민과 민주당 당원들에게 호소할 예정이다.


김영환 충청선대위원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

김영환 공동선대위장도 “이인제 후보는 자신과 싸워 이긴 준비된 후보”라며 “현재는 대선구도가 잘 형성되지 않았지만 상승과 확산, 당선 가능성이 있는 이인제 후보를 눈여겨 봐 달라”면서 11월 15일까지는 10%대 지지율로 끌어올려 줄 것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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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 성명] “진실은  오직  하나이다”

   
   또다시 이인제가 부정한 돈을 받은 사람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되고 있다.

   나는 1988년 정치를 시작한 이래 대통령이 되어 번영과 통일의 시대를 열겠다는 열망을 키워 온 사람이다.

   1997년 홀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나는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200억원의 돈을 받았다는 새빨간 거짓말로 모략을 당하였다.  온 신문과 TV에 이 거짓말이 대서특필되고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나의 지지는 1주일만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꿈이 있었기에 참고 견딜 수 있었다.

   2003년 5월 노 정권이 또다시 나를 중상 모략하였다.  월드컵 휘장이라는 말을 들어본 일도 없는 나에게 나의 전 특보 송종환과 관련하여 무슨 부정이 있는 것처럼 연일 매스컴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케 하였다. 그러나 이 음모는 송종환 동지가 6개월간의 억울한 옥살이 끝에 완전한 무죄판결을 받음으로써 결백이 입증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의 전 공보 특보 김윤수를 통하여 한나라당의 돈을 받았다는 혐의를 덮어씌우려 하고 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한나라당의 돈을 단 한푼도 받은 사실이 없으며 김 전 특보는 물론 그 누구로부터도 한나라당의 돈을 가져왔다는 말을 지금까지 들어 본 일이 없다.

   김 전 특보나 한나라당 관계자들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나는 큰 꿈을 키우며 정치를 해 왔다.  지난 대선 때 이미 밝힌 바대로 우리나라가 급진좌파노선과 친북반미세력에 정권이 넘어갔을 때 닥쳐 올 국가적 재앙을 고뇌한 끝에 이것을 막기 위해 어떤 정치적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분연히 민주당을 탈당한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중도우파세력이 대동단결하지 않고는 좌파세력의 발호를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하여 자민련에 입당하였다.  

   이렇게 나의 정치적 신념과 노선을 따라 결단을 해 온 이 사람이, 또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온갖 수모를 견디며 묵묵히 정치적 행보를 계속하고 있는 이 사람이, 구차하게 한나라당의 돈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불과 며칠 전 노 정권의 대표적인 앞잡이가 이인제를 생물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잡고 말겠다고 협박하다가 이제 선거를 불과 몇 십일 앞둔 시점에서 또다시 이런 엄청난 모략이 자행되고 있으니 통분을 금할 수 없다.

   진실은 오직 하나이다.  나는 노 정권이 벌이는 이 치졸한 정치보복에 맞서 나의 진실을 지키고 번영과 통일의 시대를 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해 나갈 것이다.


2004.  2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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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뉴스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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